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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 역사기행 • 양평 몽양기념관을 가다 103 같은 기독교 전도부인들 이 개성의 3 · 1만세 운동 에 적극 참여한 것도 기 독교 신자들이었다. 유 관순 열사도 이화학당과 천안 매봉 교회에서 신 앙을 키운 신앙의 힘으 로 매서운 길을 갈 수 있 었다는 것을 읽었다. 그 들과 신앙, 신념의 물줄 기를 같이 하고 있다. 1919년 11월, 몽양이 일본 도 쿄(東京)에 초대되었을 때 일본 측 에서 몽양을 회유한 일이 있었다. “신앙인으로서 전도 일에만 열 중하고, 임시정부 일이나 조선 독 립에 관여하지 않는다면 충분한 금전으로 보상하겠다”는 것이었 다. 임시정부 외무부위원장 대표 자격으로 초청한 일본이 몽양에 게 던진 미끼에서도 알 수 있는 것 처럼, 일본도 몽양의 정체성을 기 독교 지도자로도 인식하고 있을 만큼 그는 ‘예수쟁이’였다. 그러나 평양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 고, 권사로서 기독교에 열중했지 만, 그는 신앙에만 머물러 있지만 은 않았다. 빼앗긴 나라의 독립을 쟁취하는 것에 우선순위를 두었 다. 일찍이 이것을 눈치챈 클라크 목사는 신앙에만 열중하지 않는 몽양과 결별하게 된다. 사실, 몽양이 평양신학교에 입 학하기 몇년 전 서울에 배재학당 에서 1년, 흥화학교에서 몇 년 동 안 신학문과 접하고, 우무(郵務)학 교(관립우체학교)에서 몇 년 동안 통신원이 되기 위한 교육을 받았 다. 배재학당은 아펜젤러 선교사 가 세운 기독교 학교였다. 그곳에 서 신학문을 배웠고 ‘협성회’ 활동 을 통해 조선 사회의 정치, 문화에 대한 토론과 웅변술을 익혔다. 배 재학당은 부친의 반대에도 불구 하고, 7촌 숙부 여병현의 권유로 입학하여 신지식과 국제 감각, 신 학문을 접하였다. 그 후 충정공 민 영환(閔泳煥)이 세운 흥화학교를 다니며,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에 항거하 며 민 영환이 자결하자, 그 일을 양평 사 람들에게 연설로 전하며 우국(憂 國)의식을 심어주는 연사(演士) 역 할을 한다. 우무학교에서 우편물 배달, 등기 업무를 배웠으나, 일본 이 주는 봉급을 받지 않겠다고 물 러난다. 가정의 경제적인 책임을 위해서 몽양이 우편 업무를 보는 일에 종사했다면 우리 역사는 지 도자 한 사람을 잃을 뻔 했을 것 이다. 파란만장한 여운형의 삶, 끝내 우익에 희생 나중에 신한청년당 창당과 김 규식의 파리강화회의 파견을 주 도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가 탄 생하는 데 산파 역할을 하고. 또 일본 도쿄에서 유학생들과 기념촬영한 여운형(앞줄 왼쪽에서 다섯번째, 한국학중앙연구원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