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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 2025년 3월 테마가 있는 독립운동사 ② 순국 Focus   역사의 시선으로 관계 등을 고려하여 정부의 위치 문제는 항상 논의 의 대상이 되었다. 필리핀은 미국의 지배를 받고 있 기 때문에, 임시정부도 미국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는지도 모르겠다. 필리핀에 대한 우리 독립운동계의 관심은 그다지 크지 못했다. 그러다가 1938년 중국 우한[武漢]에서 조선의용대가 창설되었다. 조선의용대는 중국혁명 을 중심으로 동남아 각 지역의 항전운동을 집결시킬 것을 강조하면서 원동(遠東)지역의 반제통일전선을 확대시키자고 호소하고 있다. 필리핀을 비롯한 남방 지역은 우리 독립운동세력들이 늘 주목하던 곳이었 다. 『조선의용대통신』 제40기(1941. 10)에 한지성이 쓴 「조선의용대 3년래의 공작 총결」이라는 글에 따 르면, 조선의용대에서 필리핀에 통신처와 교육기관 을 설치했다고 한다. 조선의용대에서 필리핀에 통신 처를 설치하여 그곳 교민들을 교육하고, 나아가 동 남아지역 한인들을 항일투쟁에 동원할 수 있도록 하 고자 하였다. 현재 필리핀 통신처의 조직과 활동에 대한 자료가 남아있지 않아 구체적인 활동상은 알 수 없지만, 필리핀 한인들은 일제의 침략상과 기타 미군의 동향 등을 정기적으로 보고하였을 것으로 판 단된다. 태평양전쟁 직후 대한인국민회 필리핀지방회 설립 태평양전쟁 이전에 필리핀에 정확하게 몇 명의 한 국인들이 살고 있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일제 외무성의 발표에 의하면, 1939년 당시 필리핀에 42 명의 한인이 거주한다고 했다. 태평양전쟁이 발발한 직후 필리핀의 한인들은 30~40명 정도가 되었으나, 일제가 침략한 후 각지로 끌려가서 생사가 확인되지 않았다. 1941년 12월 7일 태평양전쟁을 도발한 일제는 아 시아 각국을 침략하였고, 미국과 전쟁을 시작하였 다. 필리핀정부는 미국으로 망명을 하였다. 그런데, 1944년 8월 1일 필리핀 망명정부 대통령 케손이 뉴 욕 근교 그의 저택에서 별세했다. 이에 임시정부 김 구 주석은 워싱턴 주재 임시정부 대표 이승만 박사에 게 전문(電文)으로 필리핀 망명정부 앞으로 김구 주 석을 대표하여 조의를 표하도록 지시하였다. 대한민 국임시정부와 필리핀 정부의 공식적인 접촉이었다. 1945년 1월 9일 미군이 루손섬 링가엔(Linggayen) 만에 상륙하였고, 2월 4일 마닐라를 탈환하였다. 일 본은 마닐라를 3년 1개월 1일 동안 점령하였고, 일 제 지배하에 있었던 필리핀 한인들도 해방이 되었 다. 일제 치하에 있었던 필리핀의 한인들도 해방과 동시에 3‧1절 기념식에서 ‘한인동맹회’를 조직하였 다. 필리핀의 한인동맹회 회장 박윤하는 마닐라 주 재 중국영사관을 통해 중국국민당 중앙집행위원회 에 전보를 보냈다. 그 전보 내용은, “충칭에 있는 한 국임시정부에게 알려 주시기 바랍니다. 본회(本會)는 본국 정부가 독립을 쟁취하기 위하여 온갖 노력을 경주하고 있는 데 대하여 경의를 표하는 바이며, 아 울러 적극 지지하는 바입니다.” 이같은 전보를 받은 김구 주석은 필리핀 한인동맹회에 답전을 보내 치하 를 하고, 워싱턴의 주미외교위원부에도 알렸다. 한편, 미군에 의해 루손섬이 탈환되었으나, 일제 에 의해 강제동원되어 일본군에 잡혀있던 한인 군인 들과 군속(軍屬)들은 그대로 일본 군영에 남아 있었 다. 그런데, 맥아더 장군이 마닐라를 해방하는 때에 한인동맹회 회장 박윤하가 미군으로 참전한 한인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