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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혁명군의 독립전쟁과 국내진공작전┃99 ▶ 흥경현 사변 1932년 1월 15일, 조선혁명당 · 국민부 · 조선혁명군 등 당 · 정 · 군의 주요간부 40여 명은 흥경현 하북의 서세명 집에서 일 제의 중국 만주 침략 이후 당면한 긴급 현안을 논의하는 비상 회의를 열었다. 그런데 친일단체 보민회의 밀고로 회의 개최소식이 중국 신 빈현의 공서에 알려졌고, 현공서에서는 동변도진수사 우지산 의 훈령대로 통화현 일본 영사분관에 통보하였다. 통화영사관은 1월 19일 급히 두 대의 자동차에 경찰대를 실 어 신빈현에 파견하였다. 여기에 신빈현 경찰도 이들과 합세하 여 이날 밤 서세명의 집을 포위하였다. 한밤 중에 불의의 습격 을 당한 조선혁명당 중앙집행위원회 위원장 이호원, 군사위원 회 위원장이자 조선혁명군 사령관이었던 김보안과 부사령 장 세용, 국민부 공안부위원장 이종건 등 주요간부 6명이 체포되 었다. 이들은 통화영사관으로 압송된 뒤 다시 국내로 이송되어 일제의 재판을 받았다. 이를 ‘흥경현 사건’이라고 하는데, 이후 일본영사관과 만주국 경찰들이 국민부 계열 조직의 관계자들 을 탄압하고 투옥하였다. ▶ 조선혁명당과 조선혁명군 창설 1929년 5월 만주 길림시 우마행호동(牛馬行胡洞) 거리의 국민 부(國民府) 사무소에서 양기하, 현익철, 이호원, 양세봉 등 항일독 립운동 지도자들이 모인 가운데, 남만주일대의 유일혁명군 정부인 국민부의 정규군으로 조선혁명군이 창설되었다. 민족주의 계열의 항일무장단체로 독립전쟁을 수행하고, 독립지사를 육성하기 위해 조직된 조선혁명당의 당군(黨軍)으로 거듭났으며, 1938년 9월까지 남만주 신빈, 통화, 관전, 유하현 일대에서 활발히 무장투쟁을 전 개했다. 조선혁명군 본부 유적지 (요녕성 신빈현 왕청문진 화흥학교 터) 조선혁명군 창설유적지(길림시 우마행호동, 길림시 송화강변 국민부 활동지) 조선혁명당, 조선혁명군 본부 (요녕성 무순시 신빈현 왕청문) 흥경사변 유적지. 국민부, 조선혁명군 간부 회 의 장소 신빈현 하북 서세명의 집, 폐허처럼 쇠 락하고 쓰러져가는 모습을 보며 만주지역 항 일유적지 발굴과 보존에 대한 우리나라의 실 상을 보여주다. 조선혁명군 본부 유적지 왕청문진. 신빈현에 서 동쪽 20km 위치한 곳으로 서간도 일대 한 인사회에서 ‘서울’로 불리던 항일중심지이다. 조선혁명군의 시련과 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