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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신허는 중국식 지명 계심하(鷄 心河)의 중국어 발음을 우리 동포 들이 그대로 부른 것이다. 드넓은 연해주를 1860년 북경조약으로 청나라가 러시아에 할양했는데, 그때 남은 지명이다. 1863년, 최 운보 · 양응범 두 사람이 함경도에 서 농민 13가구를 이끌고 찾아간 곳으로 연해주 한인 유민사의 출 발지이다. 그 후 지신허는 40~50 년 동안 13km 떨어진 연추와 함 께 한인들만의 공동체를 이루며 성장했으며 독립운동을 후원했 다. 연추(안치헤라고도 했다)는 1900년대 초기 인구가 10만에 육 박할 정도로 상당히 커서 상연추 (上煙秋), 중연추, 하연추 3개 지역 으로 되어 있었다. 현재 두 곳은 폐허가 되고 연추에 러시아인들 이 모여 산다. 러시아식 지명은 쭈 카노프카이다. 만주 · 연해주 독립운동, 그 현장을 가다 ③ 지신허와 연추 글 이원규(소설가) 연해주 남단 독립운동 근거지 지신허와 연추 첫 한인 정착지 지신허, 폐허로 변하고 강력한 국내진공 거점 연추는 한인들 떠난 뒤 크라스키노로 개명돼 102 2023년 5월 순국 Inside 길 따라 얼 따라 순국 역사기행 첫 한인 종착지 지신허 연해주는 1860년대에 가뭄과 탐관오리의 가렴주구를 견디지 못한 함경도 유민들이 남부여대 하여 건너가 개척한 땅이다. 당시 중국인 청나라 사람(淸國人)들이 조금 살았지만, 그때는 거의 황무 지였다. 제정러시아 황제가 임명 한 연해주 총독은 조선인 유민들 이 근면하고 순종심이 강해 황무 지를 잘 개척하자 땅을 주고 국적 도 주었다. 초기 유민으로 국적을 얻고 러시아정교회에 입교한 동 포들을 원호민(元戶民), 1910년대 이후 이주한 국적 미취득 유민을 여호민(餘戶民)이라고 불렀다. 뒷날 하바롭스크를 넘어 동시 베리아까지 1,000km 이상 내륙 으로 퍼져 올라갔지만, 초기 유민 들이 정착한 곳은 두만강 국경과 가까운 지역, 즉 시베리아 동남부 의 남단이었다. 이곳에 뿌리내린 한인들의 첫 정착지 지신허 마을 입구. 근처에 가수 서태지가 세운 안내판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