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page


101page

나자 목치숙 등과 4월 14일 고흥읍 장날 만세시위 거사계획을 세웠으나 비가 쏟아져 거사를 미룬 채 선언 서를 일제 관청에 발송했다가 발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순천성경학교와 평양신학교에서 신학을 수학하고 목사로 재직하면서 민족의식 고취에 힘을 쏟았다. 1921년에는 목치숙 등과 함께 고흥에 광명학 원을 세워 인재양성에 앞장섰다. 1937년 중일전쟁 이후 일제가 우리 민족말살을 획책하면서 기독교계는 최악의 위기에 직면했다. 많은 기독교 지도자들이 일제의 압박에 굴복하여 신사참배를 받아들이는 상황이 었으나 선생은 금산 오천교회와 도양 중앙교회 신도들을 대상으로 거부운동을 강력하게 전개했다. 이 일로 또 체포되어 소위 불경죄와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2년 4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해방 후 고흥읍교회 목사와 순천노회장으로 활동하면서 제헌 국회의원선거 고흥갑구에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소속으로 당선해 헌법 기초위원 법사위원으로 활동했다. 이후 2대 국회의원선거 낙선과 동족상잔의 6·25전쟁으로 온갖 풍상을 겪으면서도 기독교복음전과와 후진양성, 그리고 가난한 학생들 뒷바라지에 여생을 바치셨다. 1963년 시 무하시던 보성읍 교회에서 76세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으시어 소천하셨다. 조국 광복을 위해 숱한 옥고롤 치르면서도 일제에 굽히지 않는 기개를 보이고 교육사업에 몸바치신 선구자 오석주 선생은 1995년 대한민국 애족장에 추서됐다.
101page

유택은 대전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모셔져 있다. 선생의 집안은 일찍이 개화하 여 신문화,신문물 도입에 앞장섰다. 선생의 매제 황보익은 보성읍교회 목사였고 그의 아들 황성수는 국회부 의장과 전남도지사를 역임했다. 순천 세헌의원 황두연은 매제의 동생이다. 여동생 오마리아는 선생의 교육 사업에 적극 참여했으며 초대 전남교육감 박형렬의 부인이 됐다. 선생은 의령남씨인 남동학과 혼인 슬하에 약실, 안자, 예덕, 성회를 서는 이남하, 황성주, 정영한이다. 손은 백현, 은숙, 승숙이고 외손은 이성준이며 친족은 오태현, 승현이다. 선생이 그토록 아끼고 사랑했던 향리에 비를 세워 선생의 넓고 깊고 밝고 맑은 가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