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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가 있는 독립운동사 ➋ • 남미 페루 리마, 홍언의 한국독립운동 자금 모집 활동 101 리고 도산이 만든 ‘흥사단’의 창립위원장으로, 흥사 단 활동을 열심히 했다. 그만큼 홍언의 일생에서 도 산은 평생 동지요, 스승이며, 삶의 지표였다. 흥사단은 1913년 5월 13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서 하상옥·정원도·강영소 3인이 발기하고, 도산 안창 호를 비롯하여 25명이 참석하여 창단되었다. 미주에 서 창립된 흥사단은 조직적으로는 국내에서 설립된 ‘신민회’의 기관을 계승한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정신적으로는 안창호가 국내에 있을 당시 민족의 장 래를 목적으로 설립된 ‘청년학우회’에 있다고 할 수 있다. 흥사단은 일반적인 정치적 목적을 가지고 조직된 것이 아니라, 몸과 마음을 단련하여 품성, 지혜, 도덕 심을 닦는다는 ‘수양’을 목적으로 조직되었다. 무실 (務實), 역행(力行), 신의(信義), 용감(勇敢)이라는 4대 정신으로 덕(德)·체(體)·지(知) 3육(三育)을 동맹(同盟) 수련하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흥사단의 ‘수양’은 개 인적 차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민족 독립과 국 가 발전의 토대가 될 수 있는 자격과 실력을 갖출 수 있도록 훈련을 하는 것이다. 흥사단에서 훈련된 인 재들은 독립운동 단체나 혁명단체에 가입하여 민족 과 국가를 위해 활동을 하여야만 했다. 흥사단 창단 당시 단우는 40여 명이었고, 약법과 의결안을 제정하여 실시하였다. 흥사단 창립위원회 의 위원장은 홍언이 맡았다. 홍언은 도산의 뜻을 가 장 잘 알기 때문에 흥사단 창립위원장을 맡게 되었 던 것이다. 그리고 흥사단은 전국 8도에 지방 대표를 선발했는데, 남쪽 지방 대표가 없었다. 그래서, 남부 지방 대표는 남겨두고, 다른 지방 대표들은 모두 임 명을 하였다. 흥사단의 창립위원 투표는 1913년 12 월에 있었는데 그 명단은 다음과 같다. 홍언(경기도), 염만석(강원도), 민찬호(황해도), 김 종림(함경도), 정원도(전라도), 김홍균(평안도), 송 종익(경상도) 흥사단 지방위원 가운데 경기도는 홍언이 맡았고, 충청도만 빠져 있었다. 그래서 후에 충청도 대표로 조병옥을 선출하였다. 도산은 흥산단의 단우가 되기 전에는 모든 사람들에게 ‘선생’이라고 호칭하였고, 단우가 된 이후에는 ‘군(君)’이라고 불렀다. 흥사단 에서 ‘군’이라는 호칭은 ‘동지’라는 뜻을 가진 것이 었다. 샌프란시스코의 흥사단 단소를 1914년 로스앤젤 레스 노스 벙크힐(N. Bunker Hill Avenue) 240호 로 정하고, 임시 이사부를 조직하고 도산이 이사부 장에 선임되었다. 흥사단소는 1915년 로스앤젤레스 웨스트 4번가(West 4th Street) 1411호로 이전하고, 1917년 흥사단소를 노스 피규로아(North Figueroa Street) 106호로 옮겼으며, 도산의 가족들도 이곳에 서 생활하였다. 도산 가족은 1935년 12월까지 이 집 에서 살았다. 안창호의 첫 딸 이름을 지은, 홍언 홍언은 안창호를 너무나 사랑하기도 하였고, 또 열렬한 추종자였다. 안창호 또한 홍언을 동지로서, 그리고 가족과 같이 여겼다. 두 사람의 관계는 마치 ‘관포지교(管鮑之交)’라고 표현할 수 있을 정도였다. 안창호는 1912년 둘째 아들 ‘안필선’이 태어난 이후 첫 번째 딸을 보았다. 첫 딸의 이름을 어떻게 지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