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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가 있는 독립운동사 ➋ • 대한민국 공군의 효시 ‘한인비행가양성소’가 창립된, 북가주 윌로우스 101 로 인해, 외국인들은 토지를 소유할 수가 없었다. 그 렇기 때문에 대부분의 한인들은, 백인 토지소유자들 의 땅을 빌려서 토지를 경작하였다. 이런 경우를 한 인들은 자농(自農)이라고 하였다. 또 다른 한편, 소작 농(小作農)의 형태로 토지와 농구 등을 빌려서 수확 량을 일정 비율로 나누는 형태도 있었다. 이를 병작 (竝作)이라 하였다. 그러나 대규모 벼농사를 하려면 차지농(借地農)으로 토지를 빌려서 경작 이후 비용을 지불하는 것이 가장 일반적이었다. 원래 캘리포니아의 한인들은 1910년대 중반 부터 북부 새크라멘토 계곡의 커루사(Colusa), 그 렌(Glenn), 버트(Butte), 유바(Yuba), 그리고 서터 (Sutter) 카운티에 쌀을 재배하기 위해 농지를 임차 했고, 주로 커루사와 그렌 카운티 지역에 집중하 였다. 1916년부터 한인은 윌로우스, 커루사, 우드 랜드(Woodland), 맨티카(Mantica) 등에서 본격적 으로 쌀농사를 시작했다. 특히, 윌로우스와 뗄라밴 (Delevan)·우드랜드 지역은 1910년대 중반부터 한 인 이민자들의 벼농사가 시작되었다. 이 지역은 토 지가 비옥하여 벼농사에 적합하고 추수도 많 았다. 캘리포니아의 토지소유자들도 한인들이 벼농사에 천재적인 재능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 에, 한인 농부들에게 토지를 임차해 주었다. 북가주에서 벼농사를 경영하는 김종림은 1917년 에 뗄라밴에서 3~4만 달러, 윌로우스에서 맹정희는 1만 달러, 신광희는 5~6천 달러의 순이익을 보았다. 새크라멘토 계곡과 우드랜드에서 이미 쌀 재배를 확 장하여, 한인들은 1918년에 쌀농지와 수확을 대폭 확대되었다. 윌로우스에서 한인 농부들이 경작한 쌀 농지 면적만 4,200에이커였고, 수확량이 22만석에 달했다. 이에 따라 윌로우스를 비롯한 벼농사 지대 에는 많은 한인 농부들이 필요했다. 1918년 당시 윌 로우스 벼농장의 한달 임금이 120달러 정도였다. 1918년도 120달러는 2024년도 구매가격으로 환산 하면 2,508달러가 된다. 현재 월급으로 2,508달러는 큰 돈이 아니었지만, 당시 가격으로는 매우 좋은 대 우였다고 할 수 있다. 한인비행가양성소 생도들을 교육하던 교실(1920년 당시 건물 사진) 한인 비행가양성소 위 교실의 2014년 당시 모습(필자 촬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