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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가 있는 독립운동사 ➋ • 미국 로키산맥의 한국독립운동 중심지, 콜로라도주 덴버 101 될 때, 애국동지대표회를 개최하자고 했던 것이다. 애국동지회대표회에는 러시아 연해주의 한인대표들 에게도 참석을 요청했다. 애국동지대표회에는 미국 동부에 있던 이승만도 참석하였다. 박용만과 이승만 은 옥중에서 결의형제(結義兄弟)를 한 절친한 사이였 다. 이승만은 1908년 6월 18일 하버드대학에서 학 업을 마치고, 24일 석사학위를 졸업한 후 7월 6일 샌 프란시스코에 도착하였다. 이승만이 샌프란시스코 방문함에 따라, 애국동지대표회는 원래 개최일 보다 늦추어 7월 11일에 개최되었다. 박용만은 애국동지대표회를 준비하면서, 한인군 사학교 설립에 대해 대회에서 논의하자는 의견을 나 누었다. 그리고 1908년 7월 11일 우리 역사상 최초 의 해외한인대회인 ‘애국동지대표회’를 덴버의 그레 이스 감리교회(Grace Methodist Church)에서 개최 했다. 대회는 7월 14일까지 총 4일간이었으나, 12일 이 일요일이었기 때문에 실상은 3일간만 열렸다. 애국동지대표회는 원래 미주의 한인대표들이 모 두 참석할 것을 예상했지만, 미주에서 가장 큰 규모 의 한인단체인 공립협회가 참석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런지, 『공립신보』에는 겨우 36명만 참석했다고 했 고, 『덴버 타임스(Denver Times)』에는 50명 가량의 대표자들이 모였다고 했다. 참석자 가운데 유명인사 는 이승만·윤병구, 대동보국회에서는 김영욱이 참여 했다. 7월 11일 개회일에 『덴버 타임스』는 「한인애국자 들이 덴버에 모여 전쟁을 준비하다」라는 제목으로 ‘애국동지대표회’를 소개하였다. 7월 13일자 『덴버 타임스』 7월 13일자에는 “참석한 사람들은 한국을 위한 단체의 대표자들인데, 이번 대표자회의 목적은 각각의 단체들을 통합해 한 기구로 만들어 일본의 지배와 핍박에서 그들의 조국을 해방시키는 것이다” 고 했다. 3일간의 애국동지대표회에서는 일곱 가지 사항을 결정하였다. 가장 중요한 것은 국내외 한인 의 통일기관을 조직하자는 것이었고, 이를 위해 각 지에 통신국을 설치하자고 의결했다. 애국동지회대 표회의에서 결의된 통합론에 따라, 북미의 공립협회 와 하와이의 한인합성협회가 통합을 하여, 1909년 2 월 10일 미주 최대의 한인단체인 ‘국민회’가 탄생하 게 되었다. 한인소년병학교를 창설한 박용만 애국동지대표회를 마친 뒤 박용만은 덴버에서 운 영하던 노동주선소 겸 여관을 윤병구에게 부탁하고 네브라스카주 링컨으로 떠났다. 그런데, 덴버를 떠 난 박용만을 찾아온 사람이 있었다. 한말의 의병장 면암 최익현의 제자로 충북 옥천 출신인 김현구(金鉉 九)가 덴버에 있는 박용만을 찾아왔다. 김현구는 러 시아 연해주에서 정순만으로부터서 미국 덴버에 있 는 박용만을 찾아가라는 부탁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김현구는 친일외교관 스티븐스에게 총을 겨 눈 전명운 의사와 함께 시베리아를 건너고 대서양을 횡단하여 미국에 도착하였다. 1909년 4월 미국에 도착하자 전명운은 박용만을 만나기 위해 김현구와 홍승국을 데리고 덴버로 갔 다. 그러나 박용만은 덴버를 떠나고 없을 때였다. 그 래서 전명운은 김현구와 홍승국을 서양인 가정의 사 환으로 취직시켜 주었다. 김현구는 홍승국과 함께 덴버시에서 머물렀으나, 영어를 구사할 수 없을 뿐 만 아니라 서양인 가정의 일을 이해하지 못해서 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