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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의 전설(95회) • 평택의 만세시위 (2) 101 말이지?” “3월 그믐날로 하세.” “그럼, 태극기를 만들어야 해.” 이들은 태극기 30개를 만들고, 각 마을에 당일 오 후 4시에 모이도록 연락을 취했다. 1919년 3월 31일 오후 4시경, 봉남리의 북면사무 소 앞에는 500여 명의 주민이 모였다. 박성백, 최구 홍 등의 주도자들은 태극기를 나누어 주며 독립만세 를 선창했다. 500여 명의 군중이 뜨겁게 토해 내는 “대한독립만세!”소리가 드넓은 들판에 울려 퍼졌다. 이들은 주민들과 함께 대열을 지어 봉남리의 북면사 무소에 쳐들어갔다. “면장, 나오시오!” 면장을 끌어내어 앞장세웠다. 시위대는 봉남리 경 찰관주재소와 북면의 각 마을을 천천히 돌면서 오후 6시까지 독립만세를 외쳤다. 『매일신보』 1919년 4월 3일자에는 이날 시위를 다 음과 같이 보도했다, “진위군 북면 봉남리는 천도교의 근거지라 할만한 곳인데 과연 31일 5백 명의 일대가 면사무소로 몰려 가서 면장을 끌어가서 자못 위험하기 때문에 수비병 경관의 일대가 자동차를 몰아 현장에 급행하였더라.” 이날 17명이 경찰에 붙잡혀 갔다. 4월 1일 북면 은산리의 정재운(鄭在雲) 집에서 정 경순(鄭庚淳, 24세, 농업), 정문학(鄭文學), 정재운 등 5~6명이 저녁 식사 뒤에 짚신을 만들다가 정경순의 발의로 약 30명이 모여 마을 뒷산에 올라가 독립만 세를 불렀다. 산 위에서 독립만세 소리가 들리자 산 아래 마을에서도 주민들이 함께 독립만세로 호응했 다. 이어 정성숙(鄭聖淑), 최선유(崔善有, 32세, 농업) 등이 선도하여 봉남리 주재소로 가서 조선독립만세 를 외쳤다. 4월 2일에도 북면에서 여러 건의 만세시위가 일어 났다. 경관이 발포하여 해산시켰다. 그 과정에서 사 상자가 발생했다. 고덕면 진위군 고덕면은 평택역에서 북서쪽으로 약 7km 떨어진 곳이다. 4월 1일 고덕면 율포리에서 약 500명이 만세시위 를 벌였다. 그후 4월 9일 밤 8시쯤이었다. 고덕면에 만세시위 주모자를 검거하기 위해 일본 군인과 자위 단이 들이닥쳤다. 주민들은 이들에 저항하며 시위를 전개하였다. 진압세력의 발포로 6, 7명이 목숨을 잃 었고, 60여명이 부상하는 참사가 벌어졌다. 이날의 참사에 대해 『매일신보』도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각지의 소요, 경기도 진위, 육칠명이 죽고 칠십 여명 부상] 진위군 고덕면에서는 지난번 소요 이래로 일향 평정치 못하던 바, 경관대는 병정 8명과 평택자 위단원 8명과 함께 선동자를 검거키 위하여 출 장한 후 근처 촌락을 순찰하고 들어가고자 할제, 9일 오후 8시쯤되어 또 군중이 반항의 기세를 보이고 소요하였음으로 마침내 발포하였는데, 밤중의 일이 되어 자세히 알수 없으나, 6,7명이 죽고 60여명이 부상하였더라.(『매일신보』, 1919 년 4월 1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