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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 역사기행 • 중국 관내지역 독립운동, 그 현장을 가다 ③ 101 주에 있는 도시, 150년 전부터 대 륙으로 들어가는 문호였다. 홍콩 과 신흥도시 심천(深圳 )이 가깝고 도시 경제력이 높다. 그리고 격동으로 가득했던 중 국 근대사에서 혁명의 중심지 역 할을 했다. 쑨원(孫文)이 국민혁명 에 성공해 호법(護法)정부를 세웠 고 공산주의자들은 광저우봉기를 일으켰다. 프랑스 작가 앙드레 말 로는 광저우 봉기를 배경으로 장 편소설 『정복자』를 썼다. 2018년 겨울 서울신문 취재팀 과 광저우에 도착하자마자 제일 먼저 찾아간 곳은 몇 달 전 현존 이 확인된 동산백원 건물이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1938년 7 월에서 9월까지 거기 머물렀다는 사실은 알려져 있었다. 『백범일 지』에 ‘대가족 일행보다 하루 먼 저 출발하여 광저우(廣州)에 도착 했다. 이전부터 중국 군사 방면에 복무하던 이준식 채원개 두 사람 의 주선으로 동산백원(東山柏園) 을 임시정부 청사로 하고 아세아 여관에 대가족 전부를 수용하였 다.’라는 기록이 있다. 양우조 최 선화 애국지사 부부의 『제시의 일 기』와, 정정화 여사의 『장강일기』 에도 기록이 있다. 그 동산백원이 일본군 폭격으로 사라진 것으로 알았는데 광저우시 정부가 찾아 내 2018년 봄 쯤 국내에 알려졌 다. 광저우시 동산구(東山區) 휼고 원로(恤孤院路) 12호이다. 동산백원 건물은 살림집으로 쓰고 있어서 빨래도 널고 빗자루 도 널려 있어 조금 어수선해 보였 으나, 100년이 지났는데도 견고 하고 외양도 아름다웠다. 김원봉이 다닌 황포군관학교 다음 목적지는 옛 황포군관학 교가 있는 장주도(長洲島)였다. 18 년 만에 찾아갔는데 전시실 그림 들이 선명한 것으로 바뀐 것 외에 는 크게 변한 것이 없었다. 1924년 봄, 김원봉이 이끄는 의열단은 한없이 위축되고 있었 다. 김지섭이 도쿄 한복판에서 의 거를 감행하여 명성을 떨쳤으나, 군자금 모금에 실패하고 단원들 이 대거 체포당함으로써 동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어떻게 의열단 투쟁을 계속할 것인가. 김원봉이 장고를 거듭한 끝에 눈 돌린 곳이 광저우였다. 중국 국민당은 그 해 초 광저우 에서 제1차 국공합작(國共合作)을 선언했다. 군벌세력의 타도와 국 민혁명의 완성을 목표로 삼고 황 포(黃埔 )군관학교를 세우기로 했 다.‘군사와 정치인재를 양성하여 혁명군의 골간으로 삼아 제국주 의와 봉건군벌을 타도함으로써, 국민혁명의 목적을 완수하는’것 이었다. 김원봉은 중국 쪽에 지원 을 요청하기로 결심하고 광주로 임시정부가 광저우 시절에 청사로 사용했던 동산백원(2018년 겨울). 최근에 확인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