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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 역사기행 • 2 · 8 독립선언과 송계백 101 받는다(1919년 2월 15일). 상고와 공소를 거듭했지만 기각되었고 그 는 동경 감옥에서 옥고를 치른다. 7개월 15일을 채우지 못하고 그는 1920년 옥에서 순국한다. 24세였 다. 1962년 그에게 건국훈장 독립 장이 추서되었지만, 그를 기억해 주는 이는 거의 없는 것 같다. 이 글을 쓰면서 청년 유학생 송계백 선생을 생각해 본다. 혼자 몰래 현 해탄을 건넜을 때의 그의 외로움 을. 사각모 속에 숨겼던 2 · 8독립 선언서 초안문을. 최린, 손병희 선 생에게 전해진 그의 수건을. 그의 외로움과 역사에 남긴 족 적(足跡)과 그의 죽음을 아무도 기 억해주지 않는다면 그의 혼백이 얼마나 슬플까? 동경을 찾는 여행 객들조차 그의 이름을 불러주지 않는다면, 그는 참 외로울 것 같 다. 만일 그가 1919년 2월 8일에 피체되지 않았더라면, 그는 다른 유학생들(360여명)처럼 단체로 동맹 휴학을 하고 귀국을 했을지 도 모른다. 그리고 3 · 1 운동에 참 여하여 적극적으로 학생 독립 운 동을 펼쳤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못했 다. 일본은 그의 몸을 가두었고, 캄 캄한 감옥에서 그는 죽었다. 그러 나 그의 죽음은 학생들의 독립정 신을 더욱 부추겼고, 산불이 번지 듯 전국적인 학생만세운동으로 붉게 번져나갔다. 한 사람의 행보 가 역사에 남긴 큰 발자국을 생각 해본다. 그에게 국화꽃 한 바구니 올려주고 싶은 날이다. 그러고 보 니, 이글을 쓰는 오늘이 2016년 2 월 8일이다. 오늘 동경 YMCA회 관에서는 2 · 8독립선언 기념식이 열렸을 것이다. 우리나라는 설날 이다. 음력 새해의 시작이다. 시작 은 언제나 아름답다. 올해 3 · 1절에 는 동경 유학생들의 2 · 8독립선언 과 송계백 선생을 기억할 것이다. 그리고 1919년 2월 8일 아침 10시, 만국전신국을 통해 미국 윌 슨대통령과 프랑스 클레망스 수 상, 영국 로이드 조오지 수상에게 2 · 8독립서를 전달했던 똑똑한 동 경유학생들을 생각할 것이다. 도 쿄 주재 각국 대사관, 공사관, 일 본 정부의 각 대신들과 일본 귀족 원 중의원, 조선 총독, 각 신문사 와 저명한 학자들에게도 보냈던 그들의 활시위를. 그해 2월 9일 영국계 로스 치아나 데일리 뉴스 의 평론 란에 「한국 청년의 열망」 이라는 기사가 보도되기도 했다 는 것도. 그들이 쏘아올린 화살은 100여 년이 지난 오늘, 우리들 가슴에 무 엇으로 와서 꽂힐는지? 똑똑했던 우리의 동경유학생들. 그들의 활 시위는 헛되지 않았다. 갓바바시와 여기저기를 둘러보 고, 나는 다시 히비야 공원을 찾아 갔다. 몇 번씩 전철을 갈아타고 고 생 끝에야 그곳에 닿을 수 있었다. 공원의 야경을 보고 싶었기 때문 이었다. 아니, 그곳에서 100여 년 전의 유학생들의 흔적을 다시 찾 아보고 싶어서였다. 공원은 동경 시가지의 야경과 불빛만 반짝이 고 있었다. 그날 여정을 마치고 호텔로 돌 아왔지만 잠이 오질 않았다. 쏘아 올려진 화살은 허공에서 부서지 지 않는다는 생각이 가슴을 파고 들었다. 서울 출생. 이화여자대 학교 국어국문학과를 나 와 교육대학원에서 국어 교육을 전공했으며, 월간 『시문학』으로 시,『서울문 학』에 수필로 등단했다. 한국시문학문회 이사, 한 국현대시인협회 회원, 국제 펜클럽 한국본부 국제 협력위원으로 있다. 문단에 나와 시와 수필. 평론 등을 쓰며 문학의 지평을 넓혀왔다. 최근 역사 유적 지 여행을 정리한 『독립운동가 숨을 만나다』 1, 2, 3을 발간했다. 필자 강소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