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page
100 2025년 1월 테마가 있는 독립운동사 ② 순국 Focus 역사의 시선으로 장에서 오렌지, 레몬, 호두 같은 작물을 따는 것이었 다. 1905년에서 1910년 사이, 많은 한인들은 새크 라멘토 강 하부지역(Lower Sacramento River), 즉 프레즈노(Fresno) 근처의 포도농장과 리버사이드 (Riverside)와 래드랜드(Redlands) 근처의 오렌지 과 수원에서 농장 노동자로 일했다. 리버사이드의 중심 거주지를 기점으로 래드랜드, 업랜드(Upland), 클 레어몬트(Claremont) 등에 소규모의 한인 거주지가 들어섰다. 오렌지 수확기 동안에 리버사이드는 미국 에서 가장 규모가 큰 한인 거주지였다. 1907년 샌프란시스코 학교분규의 결과 나타난 「대통령령 589(Executive Order 589)」는 일본인 이 민을 배척하려는 캘리포니아주 백인의 입장을 대변 하기 위해 제정되었다. 그렇지만 실질적으로는 하와 이에서 미국 본토로 들어오려는 한인들의 이민도 중 단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1910년대에는 캘리포 니아에 거주하고 있는 일본인들의 토지 소유를 봉 쇄하기 위한 조치로서 캘리포니아 주법원이 주도해 제정한 1913년의 외국인토지법(Alien Land Act of 1913)이 한인들에게도 동일한 의도로 적용되 었다. 이러한 법적 조치에도 불구하고 일본인과 한인들은 이 법의 허점을 이용해 캘리포니아 지역에서 농지를 대규모로 임차할 수 있었고, 1912년 무렵부터 활성 화된 캘리포니아의 쌀농업에 편승해 경제적으로 크 게 발전하였다. 북가주지역 한인들의 벼농사 서 · 북간도, 연해주뿐만 아니라 한국인들이 가는 곳에서는 모두 벼농사가 시작되었다. 북미지역으로 이민을 온 한인들도 마찬가지였다. 더 넓은 캘리포 니아지역의 북부지역은 날씨가 좋고 수량이 풍부하 여 벼농사를 경작하기에 적당한 곳이었다. 벼농사는 다른 농업과 달리, 가장 중요한 것이 ‘물’이다. 벼농 사에는 ‘물’을 잘 댈 수 있는 기술이 관건이었다. 그 런데, 한국인들은 선천적으로 물을 대는 기능을 타 고났다. 어느 지역을 가도, 그곳에서 벼농사를 지을 수 있게 ‘물’을 잘 대었던 것이다. 1913년 캘리포니아주에서는 ‘외국인 토지법’으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임원들(앞줄 왼쪽부터 곽림대, 윤병구, 한 재명, 뒷줄 왼쪽이 김종림) 한인비행가양성소의 교관과 학생들(「미국 가주 한인비행대, “노백 린 장군 지휘하에”」라고 적혀 있다. USC 디지털 아카이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