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page

100 2024년 3월 테마가 있는 독립운동사 ② 순국 Focus   역사의 시선으로 다녔기 때문에, 일본인이 아니라는 것을 밝혔다. 호 세 산체스 팍(José Sànchez Pac, 한국명 최병덕)이 쓴 『교포역설』에 의하면, “한국 국기와 멕시코 국기 의 두 문양이 새겨져 있었던 이 배지를 한인들은 윗 도리의 옷깃이나 아니면 사람 눈에 쉽게 띄는 곳에 달았는데, 그것은 멕시코 당국의 검문으로부터 안전 을 추구하기 위한 행동이었다”라고 하였다. 태평양전쟁이 발발한 이후 북미의 재미한족연합 위원회 집행부에서는 1942년 7월 17일 이순여와 한 종원에게 멕시코 중앙정부 및 지방정부와 교섭할 수 있는 정식 위임장을 발급하였다. 외교위원 한종원 은 멕시코 외무부장에게 한인을 우방민(amigos)으 로 대우해 달라는 공문을 보냈으며, 멕시코 외 무부 는 한국민의 입장을 이해하고 있으며 적절한 절차를 거쳐 해결될 것이라고 하였다. 또 묵경지방회에서는 멕시코 국무경과 외무부장을 방문하여 한인들의 안 정보장 문제 등을 협의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8 월 1일 멕시코정부는 신법령을 발포하여 멕시코 한 인을 적국민(敵國民)으로 한다는 것을 발표하였다. 그렇지만 한인들의 외교적 노력으로 실지로는 ‘자유 한인’으로 대우받고 있었다. 특히, 체투말 지방의 한 인들이 일본인으로 간주되어 격리될 위기에서, 이순 여는 멕시코 중앙정부와 교섭하여 체투말 한인들의 안전을 보장받았다. 미주에서는 우리 민족이 경술국치(庚戌國恥)를 당 한 날인 8월 29일을 매년 ‘국치일’로 정해 기념식을 개최하였다. 그런데 북미의 재미한족연합위원회에 서는 1942년 8월 29일에는 국치기념식이 아닌, 대 일전 승리를 위한 ‘국기현기식(國旗懸旗式)’을 거행 하기로 하였다. 묵경지방회에서도 이순여의 주도하 에 국기현기식을 거행하였다. 멕시코 한인들의 독립운동 멕시코로 이민을 간 한인들의 삶은, 한 마디로 고 난과 파란이었다. 유카탄의 에네켄 농장에서 4년 동 안 노예와 같은 생활을 하며 보냈다. 에네켄 농장에 서 해방되자 곧바로 멕시코혁명이 일어나 경제적 어 려움에 처하게 되었다. 멕시코 한인들은 경제적 곤 란 때문에, 과테말라 혁명군에도 들어갔고, 멕시코 혁명에도 참전했다. 그리고 1921년에는 경제적 고 난을 타개해 보자 멕시코 한인 300여 명이 쿠바로 재이민을 갔다. 묵경지방회에서 대한인국민회 상무부에 보낸 대일선전 제1주년 기 념식 보고(1942.1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