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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2024년 2월 테마가 있는 독립운동사 ② 순국 Focus 역사의 시선으로 광무황제(고종)의 한국특사 파견 대한제국은 일본의 침탈이 날로 증대되면서 열강 을 상대로 국권 수호를 위한 외교활동에 집중하고 있었다. 1902년 초에는 광무황제의 칙명으로 외부 대신 박제순이 제1회 만국평화회의 명예의장인 네 덜란드 외무장관 보폴트(W. H. Beaufort)에게, 앞 으로 개최될 평화회의에 참석하기를 원하다는 공문 을 보냈다. 그 후 1905년 러일전쟁에서 일본의 승리 가 확인될 무렵, 헤이그에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가 개최된다는 소식을 들었다. 러시아는 전쟁에서 일본 에 패하였지만 극동지역에서 자국의 이익을 위해 대 한제국의 독립을 지지해야만 하는 입장에 있었다. 그 래서 러시아정부는 1905년 10월 3일 이범진(李範晉) 주러시아 공사에게 대한제국 대표가 제2회 만국평화 회의에 참석을 요청하는 초청장을 보냈다. 그러는 사 이 대한제국은 일제에 의해 1905년 11월 ‘을사늑약 (乙巳勒約, 을사5조약)’으로 외교권을 강탈당했다.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박탈당한 사정을 뻔히 아는 러시아는 1906년 4월 대한제국이 포함된 47개국 명 단까지 만들어 통지했다. 그러나 러시아의 외무대신 이즈볼스키(Aleksandr Petrovich Izvoskii)는 극동 에서 한국을 우선하는 외교정책에서 선회하여 국익 을 중시하는 친일적인 외교정책을 추진하였다. 그러 면서 1907년 4월 8일 네덜란드 정부에서 발행한 제 2회 만국평화회의의 공식 초청 대상국에 대한제국 이 제외된 채 45개국만 초청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광무황제는 헤이그에서 개최 되는 만국평화회의에 대한제국의 특사를 파견하여, 일본이 강요한 ‘을사늑약’의 불법성을 국제사회에 호소하려고 하였다. 광무황제는 제2회 만국평화회 의 초청장을 받을 당시 수석대표로 이범진 주러시아 공사를 선임하였다. 그러나 외교권이 일제에 빼앗겼 기 때문에, 이범진을 수석대표로 파견하는 것이 불 가능해졌다. 그래서 북간도 룽징(龍井)에서 서전서 숙이라는 민족학교를 경영하고 있던 전 의정부 참찬 이상설(李相卨)을 정사(正使)로 파견하기로 했다. 그 리고, 부사(副使)에는 평리원 검사 이준(李儁)을 임명 했고, 또 다른 부사는 이범진 공사의 아들 이위종(李 瑋鍾)을 임명했다. 이준은 서울을 떠날 때 광무황제의 위임장을 받았 다. 황제의 수결(手決)과 어새(御璽)가 찍힌 위임장에 는 이상설과 더불어 이준·이위종 세 특사의 이름이 병기되어 있었고, 다음과 같이 공식 특사의 자격을 부여하였다. 대한제국 특파위원 전 의정부참찬 이상설, 전 평리원검사 이준, 전 주러공사관 참서관 이위종 에게 주는 위임장 대황제는 칙서로 가로되 우리나라의 자주 독립 은 이에 천하 각국이 공인하는 바라. 짐이 지난 날 여러 나라와 조약을 맺고 수호함에 사행이 계속되었으니, 무릇 국제회의에 속한 곳에는 사 절을 파견하여 동참하는 것이 도리에 맞도다. 그런데 1905년 11월 18일 일본이 우리나라에 대하여 만국공법을 어기고 비리를 자행하여 조 약을 억지로 강요하여 우리의 외교권을 강탈하 여 여러 나라와의 우의를 단절케 하였다. 광무황제는 세 명의 한국특사에게 위임장을 주어 일제가 강요한 ‘을사늑약’의 불법성을 국제사회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