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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시절의 이광수는 독립운동의 중심에 있었다.
기미독립선언(3.1운동)의 기폭제가 된 1919년 일본 도쿄에서 유학생들을 이끌고 '2.8 독립선언서'를 기초하였고, 상하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기관지인 《독립신문》의 사장 겸 편집국장을 맡아 독립의 정당성을 홍보하고, 1937년 안창호 등과 함께 수양동우회 활동을 하다 구속되었다. 이때의 고문과 옥살이가 그의 변절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 많다.
1939년 전후로 전향을 선언한 후, 적극적인 친일 행보를 보였고, 창씨개명을 솔선수범하면서 이를 조선인들에게 권장하는 글을 썼다. 또 조선 청년들이여 대동아전쟁에 나가 천황을 위해 목숨을 바쳐라"라며 학도병 출정을 독려하는 강연과 글을 쏟아냈다. 또 내선일체의 논리를 전파하며 일제의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하였다.
해방후 1949년 반민특위(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체포되었을 때, "내가 친일을 한 것은 민족의 보존을 위한 고육지책이었으며, 일제가 승리할 줄 알았기에 민족의 피해를 최소화하려 한 것이다."라고 자신을 변호했다.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