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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2024년 9월 Column 명사 칼럼 작은 소리 큰 울림 김일성은 민족보위상 최용건을 서울방위사령 관으로 임명하고 최후의 저항을 시도했다. 그 러나 대세는 이미 기울었다. 서울로의 진격을 계속한 국군 해병 제2대대 제6중대 1소대는 9 월 27일 오전 6시 10분께 종로구 경복궁 자리 에 있었던 중앙청 첨탑에 태극기를 게양할 수 있었고, 국군은 다음날 서울을 되찾았다. 대한 민국 정부는 9월 29일에 중앙청에서 서울수복 기념식을 열었으며, 맥아더는 서울로 비행해 이승만 대통령과 악수하며 격려했다. 이처럼 새로운 활로가 열리자, 국군은 10월 1일에 38도선을 넘어 북진을 계속했고 유엔군 이 뒤따랐으며, 국군은 10월 20일에 평양을 점 령한 데 이어 10월 23~26일에 압록강에 이르 렀다. 이 시점 직전에 중공군이 군사개입해 상 황을 반전시켜 민족의 숙원이던 대한민국 주 도 아래서의 남북통일이 좌절되었음은 우리 모두 안타깝게 생각하는 사실이다. 미국을 비롯한 서방세계에서는 6·25전쟁을 그들의 표현으로는 ‘코리안 워(Korean War)’ 를 ‘잊힌 전쟁(the forgotten war)’ 또는 ‘도외 시된 전쟁(the neglected war)’이라고 부르는 경향이 있다. 그 러나 전쟁 피해자 였던 우리로서는 결코 잊을 수도 없고 도외시 할 수도 없는 전쟁이다. 그 전쟁이 남긴 상처가 너무나 컸고 그것에서 발생한 후유증은 오랜 세월이 지났는데도 완전히 치유되지 않고 오 늘날까지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 후유증으로 가장 큰 것은 상호불신이다. 북한은 남침을 개시하기 보름 전인 1950년 6월 10일에, 북한에 연금되어 있는 반일운동가였으 며 우익 지도자 조선민주당 위원장 조만식 선생 과 남한에 구속되어 있는 항일독립운동가였으 나 공산주의자였던 김삼룡·이주하를 교환하자 고 제의하면서 동시에 남북의 평화통일 구상을 발표했다. 북한의 이러한 언동은 ‘기만정책’으 로 풀이되었고, 북한의 대남 제의에는 진실성이 없다는 믿음을 심어주었다. 이후 불신을 줄이면 서 회해를 이루고 그 바탕 위에서 통일을 성취 하려는 긍정적 시도들이 뒤따랐으나, 특히 최근 북한의 최고 권력자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공개 적이면서 공식적으로 보여주는 대한민국을 향 한 적대정책은 불신을 줄이는 과제가 여전히 어 1950년 10월 31일 평양 김일성 광장에서 열린 국군의 평양 입성 환영대회 전경(연합뉴스 제공) 국군 평양 입성 환영대회에 참석한 이승만 대통령 과 프란체스카 여사 파괴된 평양의 대동강 철교를 건너 월남하는 피난민들(1950년 12월, 이상 국가기록원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