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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의 인간 이회영 우당 이회영 1867년 4월 21일(음력 3월 17일) 한양 저동 ~ 1932년 11얼 17일 중국 다렌 인간 이회영의 폭은 넓었다. 막힘도 없었다. 그는 조선 지배이념인 성리학을 넘어 양명학(강화학파)에 몰입한 소론 출신이었다. 열 정승을 낳은 집안 사람으로 가거시험이 아니라 신학문을 절에서 공부했다. 종을 풀어주고 과부가 된 여동생을 개가시킬 정도로 스스로 먼저 자기 삶에서 혁명을 이끌어낸 각성된 인간이었고, 숯장수 출신 목사와 벗하면서 남대문 평민들의 교회 지하실에서 새 하늘을 도모했다. 백지 위임장(헤이그 외교독립투쟁)을 받을 정도로 황제와 가까우면서도 정작 공화주의자였고, 조국과 겨레를 한없이 사랑하되 더 공평한 세상, 더 많은 자유를 만인이 누리는 세상을 꿈꾼 거침없는 아나키스트였다. 그는 언제나 자기 내부에서 발견한 모슨들을 타파하면서 새로운 경지로 이동해갔다. 이회영은 가장 부자였고 가장 가난했다. 의로운 생각이 바로 행동이었던 그는 패배를 몰랐고 실패도 몰랐다. 피가 맑고 뜨거웠던 그는 늘 순혈의 속도로 내달렸다. 가장 심연이 가장 표면이었다. 그는 자유였다. 그가 곧 자유였다. 스스로가 모든 해방이었다. 그는 내내 전투체제이면서 한없이 고요했다. 호수와 활화산이 한 자리에서 숨쉬고 있었다. 이회영은 모든 행동의 중심이면서도 이름과 모습을 더러내는 일을 스스로 잊었다. 그는 가장 앞이면서 가장 뒤였다. 그는 자신이 나아갈 수 있는 마지막까지 나아갔고, 자기 시대에서 나아갈 수 있는 마지막까지 나아갔던 최후의 인간이었다. 그는 난잎에서 칼을 얻는 예술가이면서 동시에 무장투쟁가였다. 둘 사이에는 티끌만한 모순도 없었다. 난초 한 이파리에 조선도, 왕도, 선비도, 민중도, 혁명도, 해방도 다 들어있었다. 이회영의 말과 칼과 시(묵란,음악,전각 등)는 하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