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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고취시켰던 선생은 1929년에 일어난 광주학생사건에 자극을 받아 학생자치 및 경찰의 교내 출입 반대 등을 외치며 학생들의 동맹휴학을 주도했고 이후 민족주의자로서 부득기 1932년 교직을 그만 두어야 했다. 이로부터 동지인 이순근 이도엽 조정래 그리고 누이동생 순금과 함께 조선반제동맹을 조직하여 한국자주독립을 위한 9개항의 요구조건을 선언하므로써 왜도를 놀라게하였다.
당시로서는 감히 누구도 용기를 낼수 없는 9개 항의 선언문에는 1. 조선어 본위 교육의 실시 2. 식민지 노예교육의 반대 3. 국유임야를 민중의 공유 4. 전 수리조합은 농민의 관리 5. 조선의 절대적 독립 6.재 조선 왜군대 및 헌병 즉시 전부 철퇴 7. 지나 만주 왜군대 및 군함 즉시 철퇴 8. 전 정치범인 즉시 무죄석방 9. 치안유지법 철퇴 등이다. 이 선언문이 지금도 한국 총무처 기록보관소에 남아있다. 이로 인하여 재판에 회부되어 4년의 형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중 신병으로 보석되었다. 그 해 8월 또다시 학교를 중심으로 항일운동을 벌였던 선생은 왜경에 체포되어 엄청난 고문을 받았다. 1935년에는 이재유 등 항일동지들과 반제국주의적 민족해방운동을 전개하여 국민들의 항일정신을 고취시켰으며 1937년에는 서울 영등포 지역을 중심으로 구성되어있는 노동자 조직을 이용해 항일운동을 펴기도 했다. 1940년을 전후해 그동안 왜의 탄압을 견디지 못해 독립운동을 포기했던 동지들을 모아 독립운동을 위한 '경성콤' 그룹을 조직했던 선생은 이떄문에 다시 수감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3년여의 옥고를 치루다 병보석이 되어 귀향했다. 1944년 3월 10일 다시 형무소로부터 수감통보를 받고 이에 불응하고 입암본가에서 도주한것이 재향의 마지막이었다. 왜말 수많은 동지들이 왜의 혹독한 고문과 회유에 못이겨 변절하는 자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