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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봉관(雲鳳館)
운봉관은 세종 10년(1428)에 청송군수였던 하담이 찬경루와 함께 건축한 것인데 객사로 사용하였다. 선조때 한차례 손보고 고쳤으며, 숙종 43년(1717)에 부사 성환이, 순조 12년(1812)에는 부사 강희옥이, 고종 8년(1871)에 부사 윤현기가 각각 중수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객사는 고을에서 가장 권위가 있던 건물이며 조정에서 파견된 관리나 외국의 사신들이 머무는 공공 숙박의 기능을 한다. 그리고 객사의 중당에는 임금의 전패를 모셔놓고 출장중인 관원과 고을의 부사가 임금께 예를 올렸다. 특히, 이곳 운봉관은 명성황후 시해사건과 단발령이 내인 이후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날 무렵인 1896년 3월 12일에 청송의 유생들이 분연히 일어나 의병을 일으킨 역사적인 장소이다.
이후 운봉관은 일제강점기인 1918년 무렵에 중당과 서익사가 강제로 철거되었고, 동익사에 '운봉관'이란 현판을 달아서 보존하여 왔다. 현재의 운봉관의 모습은 철거지에 대한 발굴조사와 고증을 거쳐 2008년에 중당과 서익사를 원형대로 복원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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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사(客舍) : 고려와 조선 시대에, 각 고을에 설치하여 외국 사신이나 다른 곳에서 온 벼슬아치를 대접하고 묵게하던 숙소. 건물의 구조는 정당(正堂)을 중심으로 좌우에 익실(翼室)을 두고, 앞면에 중문(中門)과 외문(外門), 옆면에 무랑(廡廊)등이 딸려서 붙어있다. 정당은 기와와 돌을 깔고 좌우의 익실은 온돌로 하였다.
전패(殿牌) : 임금을 상징하는 '殿'자를 새겨 각 고을의 객사에 세운 나무패. 공무로 간 관리나 그 고을 원이 절을 하고 예를 표시하였다.
익사(翼舍) : 중심이 되는 집채의 좌우에 붙어 있는 곁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