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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2023년 2월 Column 편집위원 컬럼 작은 소리 큰 울림 또 남만주에서 1919년 후반 ‘군정부’가 출범하고 이상룡이 총재로 추대되자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 부에서는 여운형(呂運亨)을 파견하여 ‘정부’라는 명칭 에 대해 이견을 제기했다. 이에 대해 이상룡은 한 민 족에게 두 정부가 있을 수 없으니, 정부를 상해 임시 정부에 양보하고, 군정부를 ‘군정서’로 개칭하며, 최 고 책임자를 독판(督辦)으로하는 ‘독판제’를 채용했 다. 그 경위를 「이상룡 행장」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 였다. “이에 앞서 이동녕 · 이동휘 · 안창호 · 이승만 등 여러 사람이 상해에서 임시정부를 세우고, 여운형을 파견 하여 더불어 단합할 것을 요청하였다. 의논이 합치되 지 못하고 분분하자, 공이 이르기를, “내 생각으로는 정부를 세운 것이 너무 빠르지만, 이미 세웠으니 한 민족에게 어찌 두 정부가 있을 수 있으리요. 또한 지 금은 바야흐로 미래를 준비해야 할 시기이니, 마땅히 단합해야 하며, 권세 있는 자리를 마음에 두어서는 안 된다.”하고, 드디어 정부를 상해에 양보하고, 군정 부를 고쳐 군정서(軍政署)라 하고서 독판제(督辦制) 를 채용하였다.” 이상룡의 개방적 자세와 포용력을 잘 알 수 있 는 부분이다. 우리는 이러한 사례를 통해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독립운동에 매진했던 지사들의 언행을 통 해 귀중한 교훈과 시사점을 얻게 된다. 카이로선언 80주년, 열강과 한국의 운명 올해는 또 미국과 영국, 중국이 카이로선언에서 한 국 독립을 약속한 지 8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1943년 11월 27일 이집트 카이로에서 미 · 영 · 중 3국 이 발표한 공동 선언문에는 ‘한민족의 노예 상태에 유의하여 적당한 시기에(in due course) 한국을 독 립시킨다’는 내용이 담겼다. 카이로회의는 한국의 독 립이 결의된 첫 국제회의였지만, 독립 시점을 명확히 하지 않은 탓에 나중에 신탁통치 관련 갈등으로 큰 후유증을 초래했다. 이 선언 당시 100여개의 약소민족이 식민지나 반 (半)식민지 상태에 있었으나, 열강에게 독립을 보장 받은 민족은 한국이 유일했다. 이 선언은 1945년 7 월 26일의 포츠담선언에도 계승되었다. 이처럼 우 리민족의 독립을 가능케 해준 순국선열들의 헌신과 카이로선언의 주역 장제스 · 루스벨트 · 처칠(왼쪽부터)이상룡의 생가 안동 임청각(임청각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