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조선 19대 숙종과 제1계비 인현왕후 민씨, 제2계비 인원왕후 김씨의 서오릉내 명릉(明陵) 숙종의 원비 인경왕후는 서오릉 안에 있는 익릉에 따로 안장되어 있고, 숙종은 경종을 낳은 장희빈과 영조를 낳은 숙빈 최씨 등을 후궁으로 두었다.인현왕후는 1681년 숙종의 계비가 되었다. 희빈 장씨의 무고로 폐위되었다가 갑술환국 때 복위되었으나 숙종 26년 원인 모를 병으로 승하했다. 제2계비 인원왕후는 1702년 왕비로 책봉되었으며 1757년 승하했다
[본문] 요절한 의경세자 대신 즉위한 조선 8대 임금 예종과 계비 안순왕후 한씨의 서오릉내 창릉(昌陵) 8대 예종(睿宗, 1450~69)과 계비 안순왕후(安順王后, ?~1498) 한씨의 능이다. 예종은 세조와 정희왕후의 둘째 아들로, 의경세자가 요절하는 바람에 19세에 세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짧은 재위기간(14개월) . 효성이 지극했던 예종은 세조의 승하를 너무 슬퍼한 나머지 건강을 해쳐 세조 때부터 시작한 『경국대전(經國大典)』을 완성했으나 반포
[본문] 성종의 아버지, 덕종(德宗)으로 추존된 의경세자의 서오릉내 경릉(敬陵) 의경세자는 세조의 장남으로 왕세자에 책봉되었다. 20세에 승하한후 둘째 아들인 성종에 의해 덕종으로 추존되었다. 소혜왕후는 아들 성종이 즉위하자 왕대비(인수대비)가 되었다. 소혜왕후는 성품이 총명하고 학식이 깊어 부녀자들의 예의범절을 가르치기 위한 『내훈(內訓)』이란 책을 간행하기도 했다. 소혜왕후는 손자 연산군이 생모 윤씨의 폐비·사사 사건에 대해 보복
[본문] 사도세자(장조)의 어머니 영빈(暎嬪) 이씨의 서오릉내 수경원(綏慶園) 조선 21대 영조의 후궁 영빈(暎嬪) 이씨의 능. 영빈 이씨는 어려서 궁중에 들어가 영빈에 봉해졌다. 영조의 깊은 총애를 받았으며, 4명의 옹주와 사도세자를 낳았다. 그후사도세자가 폐위당하고 죽음을 맞는 슬픔을 겪으면서도 의연함을 잃지 않았다. 69세로 승하하자 영조는 매우 애통해하면서 후궁 제일의 의식으로 장례지냈다. 처음에 지금의 연세대학교 안 수경원
[본문] 대학동기들 청계산 등반과 청계산 특전사 충혼비 동기들과 같이 청계산등산이 있었다. 끝난 다음에 시원한 막걸리까지..
[본문] 조선왕릉 탐사 네번째. 정릉, 홍릉길의 영휘원과 숭인원, 구 중앙정보부 내부에 있던 의릉, 조선왕계도 조선왕릉 탐사 네번째. 신덕왕후 강씨의 정릉(貞陵),조선의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의 생모, 고종 순헌귀비 엄씨의 영휘원(永徽園), 그리고 영친왕의 아들의 이진의 묘 숭인원,그리고 구 중앙정보부내부에 있던 장희빈의 아들,경종의 의릉(懿陵)를 찾았다.
[본문] 조선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과 이방자 황태자비의 아들 이진(晉)의 숭인원(崇仁園) 조선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의 아들 이진(1921~22)의 묘이다. 영친왕은 형인 순종이 즉위하면서 황태자가 되었으나 11세에 일본에 볼모로 잡혀갔다. 원래 약혼녀가 있었으나 일제에 의해 강제로 파혼하고, 1920년 일본 왕실의 나시모토 마사코(이방자)와 정략결혼을 하였다. 조선 황실의 후손을 끊어놓으려는 일본의 노력에고 불구하고 1921년 아들 진을 얻었으
[본문] 조선의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의 생모, 고종 순헌귀비 엄씨의 영휘원(永徽園) 귀비 엄씨는 파란만장한 삶을 산 여인이다. 5세에 경복궁에 들어가 이후 명성황후의 시위상궁이 되었다가 32세 때 고종의 승은을 입었다. 이로 인해 명성황후의 진노를 사 궁 밖으로 내쫓겼다가 1895년 명성황후가 시해되는 을미사변이 일어난 지 5일 만에 환궁하였다.황귀비는 생전에 서구식 신교육에 관심을 가지고, 양정의숙,진명여학교설립, 숙명여학교에 많은 기부
[본문] 구 중앙정보부가 망가트린 장희빈의 아들,경종의 의릉(懿陵) 오랫동안 중앙정보부가 관리하며 정자각 앞에 연못을 파고 각종 정원수를 심어 변형시켜놓았던 것을 문화재청이 10년에 걸쳐 복구하여 지금의 모습을 되찾은 조선 20대 경종(景宗, 1688~1724)과 계비 선의왕후(宣懿王后, 1705~30) 어씨의 능.
[본문] 태조 이성계에게 버들잎 떠있는 물바가지를 건넨 신덕왕후 강씨의 정릉(貞陵) 태조는 도성 안에 왕릉 터를 정하고, 강씨 봉분 우측에 자신의 봉분인 수릉(壽陵)까지 정하고, 수릉의 능호를 정릉(貞陵)으로 정하였다. 조선 왕릉 첫 능호인 정릉에서 오늘날 중구 정동이 유래되었다. 태조에 이어 즉위한 태종은 능역 100보 근처까지 주택지로 허락하고, 광통교(현재의 광교)가 홍수에 무너지자 능의 석물 중 병풍석을 광통교 복구에 사용하였으며,
[본문] 조선왕릉 탐사 세번째. 세곡동 안기부옆의 헌인릉(獻仁陵) 헌릉(獻陵)은 조선 3대 태종과 그의 비 원경왕후 민씨의 능이며, 이 능을 바라보아 왼쪽에 있는 인릉(仁陵)은 23대 순조와 그의 비 순원왕후 김씨의 능이다. 이 헌릉과 인릉을 합쳐 ‘헌인릉’이라고 부른다.
[본문] 조선 23대 순조(純祖)와 비 순원왕후 김씨의 합장릉인 헌인릉내 인릉(仁陵) 조선 23대 순조(純祖, 1790~1834)와 비 순원왕후(純元王后, 1789~ 1857) 김씨의 합장릉이다. 순조는 정조의 둘째 아들로 11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여 대왕대비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였다. 이때부터 외척의 세도정치가 시작되어 순조의 개혁정치 노력에도 불구하고 과거제도의 문란, 매관매직 성행 등 정치기강이 무너져 사회가 혼란해졌고, 홍경래의
[본문] 태종 이방원과 원경왕후 민씨의 헌인릉내 헌릉(獻陵) 태종은 태조와 신의왕후 한씨의 다섯 번째 아들로 이성계가 조선왕조를 건국하는 데 큰 공을 세워 정안군에 봉해졌다. 왕위 계승을 둘러싼 왕자의 난을 평정하고 정종에 이어 왕위에 오른 태종은 1405년 개경에서 한양으로 천도하였고 조선왕조의 기반을 닦는 데 많은 치적을 남겼다. 원경왕후는 태종이 왕위에 오르기까지 많은 도움을 주었으나 태종이 왕권을 잡은 뒤
[본문] 조선왕릉 탐사 두번째. 조선의 마지막 황제 홍유릉(洪裕陵)과 안타까운 사연의 사릉, 광해군묘 조선의비운의 황제 고종과 명성황후의 홍릉, 마지막 황제 순종의 유릉이 있는 호유릉(洪裕陵), 안타까운 단종 비의 사릉, 불운의 왕제 광해군묘와 그의 어머니 성묘.
[본문] 태왕사신기의 촬영지 구리시 아천동, 아차산의 고구려 대장간마을 드라마 태왕사신기의 촬영지 구리시 아천동, 아차산의 고구려 대장간마을이 새로운 4월25일 재 개장을 앞두고 마무리중이었다.
[본문] 태종 후궁으로 성종까지 7대의 내명부를 지킨 명빈김씨의 아차산 명빈묘(明嬪墓) 서울로 돌아오기위해 워커힐쪽으로 오는 아차산기슭에서 태종 후궁으로 성종까지 7대의 내명부를 지킨 명빈김씨의 아차산 명빈묘(明嬪墓)
[본문] 죽어서 어머니 발치에 묻힌 15대 폐위군주 광해군묘와 공빈(恭嬪)김씨의 성묘(송릉/松陵,成墓) 불운의 왕제로서 죽은후에 어머니 발치에 묻히길바랬던 15대 폐위군주 광해군묘와 공빈(恭嬪)김씨의 성묘(송릉/松陵,成墓)
[본문] 한많은 단종 비 정순왕후(定順王后)의 사릉(思陵) 영월에서 가엾게 죽어간 단종을 기리는 한많은 단종 비 정순왕후(定順王后)의 사릉(思陵)
[본문] 조선왕실의 마지막 황제 순종황제,순명효황후,순정효황후의 삼합장릉인 홍유릉내 유릉(裕陵) 조선 마지막 능으로 27대 순종황제(純宗皇帝, 1874~1926)와 원비 순명효황후(純明孝皇后, 1872~1904), 계비 순정효황후(純貞孝皇后, 1894~1966)의 삼합장릉이다.
[본문] 고종황제와 명성황후의 홍유릉내 홍릉(洪陵) 비운의 고종황제와 명성황후의 홍유릉의 홍릉(洪陵)
[본문] 조선왕릉 탐사 첫날 동구릉(東九陵) 조선의 왕과 왕비 17위의 유택이 마련돼 있는 곳으로 동구릉은 ‘동쪽에 아홉 개의 왕릉이 있다’ 하여 이름붙여진 우리나라 최대 규모의 왕릉군이다. 1408년 조선왕조를 세운 태조 이성계가 승하하자 태종의 명으로 파주, 고양 등지에서 좋은 묏자리를 물색하여 능지로 정해진 곳이다. 동구릉의 조성은 조선왕조 전 시기에 걸쳐 이루어졌다. 동구릉이라고 부른 것은
[본문] 조선 5대 임금 문종의 동원이강릉 형식인 동구릉내 현릉(顯陵) 현릉(顯陵).조선 5대 문종(文宗, 1414~52)과 현덕왕후(顯德王后, 1418~41) 권씨의 능이다. 문종은 세종의 장자이며 어머니는 소헌왕후이다. 1450년 왕위에 올라 언로를 열어 민의를 파악했고, 문무를 중용하고 군사제도를 개편하였다. 그러나 몸이 허약했던 문종은 재위 2년 4개월 만에 보령 39세로 승하하였다. 문종의 시호는 공순(恭順)이다. 부
[본문] 추존왕 익종(翼宗) 효명세자(문조)와 조선후기의 역사를 움직인 조대비 신정황후의 동구릉내 수릉(綏陵) 수릉(綏陵).추존 황제 문조(文祖, 1809~30)와 신정황후(神貞皇后, 1808~90) 조씨의 합장릉이다. 문조는 세자 시절부터 대리청정을 하면서 인재를 널리 등용하고, 형옥을 신중하게 하며, 모든 백성을 위한 정책 구현을 위해 노력했으나 22세에 요절했다. 의릉 왼쪽 언덕에 장사지냈는데, 1846년 풍수상 불길하다는 논의가 있어 양주 용마산 아래로 옮겼
[본문] 조선왕조 20대 경종의 윈비 단의왕후의 동구릉내 혜릉(惠陵) 혜릉(惠陵).조선 20대 경종의 원비 단의왕후(端懿王后, 1686~1718) 심씨 능이다. 단의왕후는 타고난 품성이 어질고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덕을 갖춰 양전(兩殿)과 병약한 세자를 섬기는 데 손색이 없었다고 한다. 숙종 44년 승하하여 숭릉 왼쪽 산줄기에 모셔졌다가 1720년 경종이 즉위하자 단의왕후에 추봉되었다. 능역이 전반적으로 좁고 길게 자리하고
   [101]  [102]  [103]  [104]  [105]  [106]  [107]  [108]  [109]  [110]  [111]  [112]  [113]  [114]  [115]  [116]  117  [118]  [119]  [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