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조선왕릉 탐사 다섯번째. 서오릉과 서삼릉 조선왕릉 탐사 다섯번째. 일산에 있는 서오릉과 서삼릉을 찾았다.서오릉의 경릉·창릉·익릉·명릉·홍릉,서삼릉의 희릉, 예릉을 볼수있었다.또 서삼릉에서 관리하는 몇군데는 축협의 초지안에 릉이 있어서 볼수가없었다.
[본문] 사도세자 큰아들 의소세자의 서삼릉내 의령원(懿寧園)과 효창공원에서 옮겨온 정조와 의빈 성씨의 아들 문효세자의 효창원(孝昌園) 의령원은 영조의 아들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의 큰아들 의소세손의 원이다. 태어난 다음해 세손에 책봉되었으나 이듬해 3세의 나이로 죽었다. 처음에 서울 서대문구 북아현동(현 추계예술대학, 중앙여고 자리)에 묻혔다가 1949년 이곳으로 이장. 효창원은 정조와 의빈 성씨의 아들 문효세자의 원이다. 처음에는 용산구 청파동에 장사지내 효창묘라 했다가 효창원으로 바
[본문] 조선 11대 중종의 제1계비 장경왕후 윤씨의 서삼릉내 희릉(禧陵) 처음에는 헌릉 서쪽 언덕에 조성. 그런데 중종의 부마가 된 김안로가 세자(인종)를 보호한다는 구실로 희릉 천릉사건, 희릉 밑에 큰 돌이 깔려 있어 불길하다 하여 중종 32년 현재의 위치로 옮기게 되었다. 중종의 유교에 따라 중종의 정릉을 희릉 옆에 조영하고, 정자각을 왕릉과 왕비릉 중간으로 옮겨 세우고, 왕의 능호를 사용했다. 그후 문정왕후의 주장에 의해
[본문] 강화도령 조선 25대 철종과 그의 비 철인왕후의 서삼릉내 예릉(睿陵) 강화도령으로 불리며 세도정치에 휘둘렸던 철종의 삶과는 달리, 철종의 뒤를 이어 즉위한 고종은 철종의 능을 매우 거창하고 웅장하게 꾸미게 된다. 이는 왕실의 오랜 세도정치를 타파하고 왕권강화를 꿈꾸던 대원군의 뜻이기도 하였다. 부덕이 높은 여인이었던 철인왕후는 1878년(고종 15)에 승하 후 철종 곁에 안장되었다 .
[본문] 숙종의 빈에서 왕비로, 다시 빈이 된 경종의 어머니 장희빈의 서오릉내 대빈묘(大嬪墓) 숙종 12 숙원(淑媛)이 되었으며 왕자 윤(경종)을 낳았다. 이듬해 숙종이 송시열 등 서인의 반대를 물리치고 윤을 원자로 책봉함에 따라 내명부 정1품 희빈에 올랐다.남인이 집권하면서 인현왕후가 폐위되었고 윤이 세자로 책봉되면서 왕비로 책봉되었다. 인현왕후가 복위됨에 따라 다시 희빈으로 밀려났다. 1701년 민비가 병으로 죽자, 인현왕후를 무고했다는 서인의
[본문] 13년밖에 살지못한 명종의 큰아들 순회세자와 빈 공회빈윤씨 서오릉내 순창원(順昌園) 조선 13대 명종의 큰아들 순회세자(順懷世子)와 그의 빈 공회빈(恭懷嬪) 윤씨의 능이다. 순회세자는 7세에 세자로 책봉되었다. 황대임의 딸과 혼담이 오갔으나 그녀가 병약하여 1년 넘게 가례를 미루자 1559년 윤옥의 딸로 세자빈이 교체되어 가례를 올렸다. 그러나 순회세자는 가례를 올린 지 얼마 되지 않아 후사도 잇지 못한 채 1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
[본문] 쌍릉으로 조성되었으나, 한쪽이 비어있는 영조의 원비 정성왕후의 서오릉내 홍릉(弘陵) 영조는 정성왕후의 묏자리를 정하면서 능 오른쪽(바라보아 왼쪽)을 자신의 자리로 잡아놓으면서 쌍릉으로 예상하여 배치해놓았으나 영조 승하 후 정조는 영조의 능을 완전한 길지라고 주장하는 지금의 원릉 자리(동구릉)에 정했으므로 홍릉은 이처럼 한 쪽에 빈 채로 남아 있다. 영조가 원래 자신의 자리로 정해놓았던 자리는 비어 있고(우허제右虛制) 그 앞으로 석물이 놓
[본문] 서오릉 가장 높은곳에 위치한 조선 19대 숙종의 원비 인경왕후 김씨의 익릉(翼陵) 조선 19대 숙종의 원비 인경왕후(仁敬王后, 1661~80) 김씨의 능이다. 인경왕후는 1670년 세자빈으로 간택되어 1674년 숙종이 즉위하면서 왕비로 책봉되었다. 20세 때 천연두를 앓다가 승하했다. 슬하에 공주 셋을 낳았으나 명선·명혜·명안공주 모두 오래 살지 못했다.
[본문] 조선 19대 숙종과 제1계비 인현왕후 민씨, 제2계비 인원왕후 김씨의 서오릉내 명릉(明陵) 숙종의 원비 인경왕후는 서오릉 안에 있는 익릉에 따로 안장되어 있고, 숙종은 경종을 낳은 장희빈과 영조를 낳은 숙빈 최씨 등을 후궁으로 두었다.인현왕후는 1681년 숙종의 계비가 되었다. 희빈 장씨의 무고로 폐위되었다가 갑술환국 때 복위되었으나 숙종 26년 원인 모를 병으로 승하했다. 제2계비 인원왕후는 1702년 왕비로 책봉되었으며 1757년 승하했다
[본문] 요절한 의경세자 대신 즉위한 조선 8대 임금 예종과 계비 안순왕후 한씨의 서오릉내 창릉(昌陵) 8대 예종(睿宗, 1450~69)과 계비 안순왕후(安順王后, ?~1498) 한씨의 능이다. 예종은 세조와 정희왕후의 둘째 아들로, 의경세자가 요절하는 바람에 19세에 세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짧은 재위기간(14개월) . 효성이 지극했던 예종은 세조의 승하를 너무 슬퍼한 나머지 건강을 해쳐 세조 때부터 시작한 『경국대전(經國大典)』을 완성했으나 반포
[본문] 성종의 아버지, 덕종(德宗)으로 추존된 의경세자의 서오릉내 경릉(敬陵) 의경세자는 세조의 장남으로 왕세자에 책봉되었다. 20세에 승하한후 둘째 아들인 성종에 의해 덕종으로 추존되었다. 소혜왕후는 아들 성종이 즉위하자 왕대비(인수대비)가 되었다. 소혜왕후는 성품이 총명하고 학식이 깊어 부녀자들의 예의범절을 가르치기 위한 『내훈(內訓)』이란 책을 간행하기도 했다. 소혜왕후는 손자 연산군이 생모 윤씨의 폐비·사사 사건에 대해 보복
[본문] 사도세자(장조)의 어머니 영빈(暎嬪) 이씨의 서오릉내 수경원(綏慶園) 조선 21대 영조의 후궁 영빈(暎嬪) 이씨의 능. 영빈 이씨는 어려서 궁중에 들어가 영빈에 봉해졌다. 영조의 깊은 총애를 받았으며, 4명의 옹주와 사도세자를 낳았다. 그후사도세자가 폐위당하고 죽음을 맞는 슬픔을 겪으면서도 의연함을 잃지 않았다. 69세로 승하하자 영조는 매우 애통해하면서 후궁 제일의 의식으로 장례지냈다. 처음에 지금의 연세대학교 안 수경원
[본문] 대학동기들 청계산 등반과 청계산 특전사 충혼비 동기들과 같이 청계산등산이 있었다. 끝난 다음에 시원한 막걸리까지..
[본문] 조선왕릉 탐사 네번째. 정릉, 홍릉길의 영휘원과 숭인원, 구 중앙정보부 내부에 있던 의릉, 조선왕계도 조선왕릉 탐사 네번째. 신덕왕후 강씨의 정릉(貞陵),조선의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의 생모, 고종 순헌귀비 엄씨의 영휘원(永徽園), 그리고 영친왕의 아들의 이진의 묘 숭인원,그리고 구 중앙정보부내부에 있던 장희빈의 아들,경종의 의릉(懿陵)를 찾았다.
[본문] 조선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과 이방자 황태자비의 아들 이진(晉)의 숭인원(崇仁園) 조선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의 아들 이진(1921~22)의 묘이다. 영친왕은 형인 순종이 즉위하면서 황태자가 되었으나 11세에 일본에 볼모로 잡혀갔다. 원래 약혼녀가 있었으나 일제에 의해 강제로 파혼하고, 1920년 일본 왕실의 나시모토 마사코(이방자)와 정략결혼을 하였다. 조선 황실의 후손을 끊어놓으려는 일본의 노력에고 불구하고 1921년 아들 진을 얻었으
[본문] 조선의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의 생모, 고종 순헌귀비 엄씨의 영휘원(永徽園) 귀비 엄씨는 파란만장한 삶을 산 여인이다. 5세에 경복궁에 들어가 이후 명성황후의 시위상궁이 되었다가 32세 때 고종의 승은을 입었다. 이로 인해 명성황후의 진노를 사 궁 밖으로 내쫓겼다가 1895년 명성황후가 시해되는 을미사변이 일어난 지 5일 만에 환궁하였다.황귀비는 생전에 서구식 신교육에 관심을 가지고, 양정의숙,진명여학교설립, 숙명여학교에 많은 기부
[본문] 구 중앙정보부가 망가트린 장희빈의 아들,경종의 의릉(懿陵) 오랫동안 중앙정보부가 관리하며 정자각 앞에 연못을 파고 각종 정원수를 심어 변형시켜놓았던 것을 문화재청이 10년에 걸쳐 복구하여 지금의 모습을 되찾은 조선 20대 경종(景宗, 1688~1724)과 계비 선의왕후(宣懿王后, 1705~30) 어씨의 능.
[본문] 태조 이성계에게 버들잎 떠있는 물바가지를 건넨 신덕왕후 강씨의 정릉(貞陵) 태조는 도성 안에 왕릉 터를 정하고, 강씨 봉분 우측에 자신의 봉분인 수릉(壽陵)까지 정하고, 수릉의 능호를 정릉(貞陵)으로 정하였다. 조선 왕릉 첫 능호인 정릉에서 오늘날 중구 정동이 유래되었다. 태조에 이어 즉위한 태종은 능역 100보 근처까지 주택지로 허락하고, 광통교(현재의 광교)가 홍수에 무너지자 능의 석물 중 병풍석을 광통교 복구에 사용하였으며,
[본문] 조선왕릉 탐사 세번째. 세곡동 안기부옆의 헌인릉(獻仁陵) 헌릉(獻陵)은 조선 3대 태종과 그의 비 원경왕후 민씨의 능이며, 이 능을 바라보아 왼쪽에 있는 인릉(仁陵)은 23대 순조와 그의 비 순원왕후 김씨의 능이다. 이 헌릉과 인릉을 합쳐 ‘헌인릉’이라고 부른다.
[본문] 조선 23대 순조(純祖)와 비 순원왕후 김씨의 합장릉인 헌인릉내 인릉(仁陵) 조선 23대 순조(純祖, 1790~1834)와 비 순원왕후(純元王后, 1789~ 1857) 김씨의 합장릉이다. 순조는 정조의 둘째 아들로 11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여 대왕대비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였다. 이때부터 외척의 세도정치가 시작되어 순조의 개혁정치 노력에도 불구하고 과거제도의 문란, 매관매직 성행 등 정치기강이 무너져 사회가 혼란해졌고, 홍경래의
[본문] 태종 이방원과 원경왕후 민씨의 헌인릉내 헌릉(獻陵) 태종은 태조와 신의왕후 한씨의 다섯 번째 아들로 이성계가 조선왕조를 건국하는 데 큰 공을 세워 정안군에 봉해졌다. 왕위 계승을 둘러싼 왕자의 난을 평정하고 정종에 이어 왕위에 오른 태종은 1405년 개경에서 한양으로 천도하였고 조선왕조의 기반을 닦는 데 많은 치적을 남겼다. 원경왕후는 태종이 왕위에 오르기까지 많은 도움을 주었으나 태종이 왕권을 잡은 뒤
[본문] 조선왕릉 탐사 두번째. 조선의 마지막 황제 홍유릉(洪裕陵)과 안타까운 사연의 사릉, 광해군묘 조선의비운의 황제 고종과 명성황후의 홍릉, 마지막 황제 순종의 유릉이 있는 호유릉(洪裕陵), 안타까운 단종 비의 사릉, 불운의 왕제 광해군묘와 그의 어머니 성묘.
[본문] 태왕사신기의 촬영지 구리시 아천동, 아차산의 고구려 대장간마을 드라마 태왕사신기의 촬영지 구리시 아천동, 아차산의 고구려 대장간마을이 새로운 4월25일 재 개장을 앞두고 마무리중이었다.
[본문] 태종 후궁으로 성종까지 7대의 내명부를 지킨 명빈김씨의 아차산 명빈묘(明嬪墓) 서울로 돌아오기위해 워커힐쪽으로 오는 아차산기슭에서 태종 후궁으로 성종까지 7대의 내명부를 지킨 명빈김씨의 아차산 명빈묘(明嬪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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