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을 폐위시킨 인조의 친부, 추존왕 원종과 인헌왕후 구씨의 김포 장릉(章陵) 원종은 선조의 다섯째 아들 정원군으로 용모가 출중하고 태도가 신중했으며, 효성과 우애가 남달라 선조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정원군은 처음엔 양주군 곡촌리에 묻혔다. 큰아들 능양군(인조)이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왕위에 오르자 정원군은 대원군에 봉해졌고, 묘가 원으로 추숭되어 흥경원(興慶園)이라 했다. 그후 인조는 정원군묘를 김포현의 성산 언덕으로 천
[본문] 왕비 책봉 7일 만에 폐출된, 인왕산 치마바위의 주인공인 중종원비 단경왕후신씨 온릉(溫陵) 연산군에게 여동생을 시집보내 영의정이 된 신수근.중종이 왕자시절 딸을 시집왕자비로 시집보냈다. 중종반정에 참여하지 않으므로 참살되고, 중종비가된 딸이 7일만에 페비가된 애처러운 사연.폐비가 된후 인완산에 치마를 걸어서 중종을 연모했었다.
[본문] 영조의 요절한 장자이면서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의 아버지가 된 추존왕 진종(효장세자)의 파주삼릉(공순영릉(恭順永陵))내 영릉(永陵) 진종은 7세에 왕세자에 책봉되었으나 3년후 숨을 거두자 시호를 효장(孝章)이라 했다. 영조는 사도세자를 뒤주에 갇혀 죽게 한 뒤 사도세자의 맏아들인 왕세손(정조)을 효장세자의 양자로 입적시켜 왕통을 잇게 했다. 정조가 즉위함에 따라 효장세자는 양부(養父)로서 진종으로 추존되었으며 그 후 1908년 황제로 추존, 진종소황제가 되었다.
[본문] 한명회의 넷째 딸로 언니의 릉의 옆에 있는 성종비 공혜왕후 한씨의 파주삼릉(공순영릉(恭順永陵))내 순릉(順陵) 공혜왕후는 한명회의 넷째 딸로 순릉과 마주보고 있는 공릉의 장순왕후와 자매지간이다. 의경세자(덕종)의 둘째아들 자산군에게 출가했다. 효심이 깊은 예종은 세조의 장례를 치르면서 건강을 잃어 재위 14개월 만에 승하했다. 이때 예종의 아들 제안대군은 겨우 3세에 불과했고, 15세인 월산군은 병약하여 자산군(성종)이 왕위를 계승함에 따라 왕비로 책봉되었다.
[본문] 17세에 승하한 한명회의 셋째딸 조선 8대 예종의 원비 장순왕후 의 파주삼릉(공순영릉(恭順永陵))내 공릉(恭陵) 세조때 한명회는 영의정까지 오르면서 권력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병약한 세자(덕종)가 죽고 세조의 둘째 아들(예종)이 왕세자에 책봉되자 한명회는 그의 딸을 세자빈의 자리에 앉혔다. 그러나 다음해 인성대군을 낳고 산후병을 앓다가 승하했다. 장순왕후는 아름답고 정숙하여 세자빈으로 간택된 뒤 시아버지인 세조에게 사랑받았다고 전해진다. 이에 세조는 왕세자빈에게 장
[본문] 8개월의 조선 최단재임이면서 효자였던 조선12대 인종과 인성왕후 박씨의 서삼릉내 비공개 효릉(孝陵) 인종은 중종의 맏아들로 왕위에 오른 지 9개월 만에 이복동생인 경원대군에게 전위한다는 것과 죽은 뒤 반드시 부모의 능 곁에 묻어주고 장사를 소박하게 치를 것을 유교로 남기고 보령 31세의 나이로 승하했다. 인종은 유교대로 어머니 장경왕후(희릉) 옆 언덕에 안장되었고, 인종의 효성을 나타내기 위하여 능호를 ‘효릉’이라 했다. 인성왕후도 후일 인종 왼쪽에 비
[본문] 일제시대, 해방후 도시화로 한곳으로 모인 서삼릉내 후궁묘, 왕자/공주의 묘 그리고 조선 왕실 태실 본래왕릉영역 내에는 후궁,왕자,공주의묘를 쓰지못하도록되어있으나, 일제시대및 해방후 도시화에 따른 개발과정에서 전국각지의 명산에 있는 후궁들의 묘, 왕자와 공주들의 묘, 그리고 조선왕조 왕실의 태실이 한곳에 모여있는 45묘, 태실54기가 들어있는 왕실의 집장묘. 1. 유명 조선국 증경빈 이씨 2. 조선국 귀인 경주김씨 지묘 3. 귀인 평양조씨 지묘 4
[본문] 연산군의 어머니 폐비 윤씨의 비공개 회묘(회릉/懷陵,懷墓) 심한 투기와 모함으로 폐위되어 사약을 받았다. 연산군의 즉위 후를 생각한 성종은 묘비조차 없던 윤씨의 묘에 ‘윤씨지묘’라는 묘비를 세우도록 허락했다.성종이 승하하고 그 국장기간에 연산군은 자신이 폐비 윤씨의 자식임을 알게 되었다. 연산군은 윤씨의 묘를 능으로 승격시키고, 묘호를 회묘에서 회릉으로 고쳤다.연산군이 중종반정으로 폐위되자 회릉은 다시 회묘로 격
[본문] 조선왕릉 탐사 일곱번째. 연산군묘와 선정릉 조선왕릉 탐사 일곱번째. 광해군묘에 다녀오면서 오랫만에 예전에 살던 상계동과 몇년전에 있던 선정릉 바로앞의 사무실등등.
[본문] 왕비 3명의 능이 모두 별도로 있는 조선 11대 임금 중종의 선정릉내 정릉(靖陵) 원래는 고양(高陽)에 예장하고 묘호를 중종, 능호를 희릉(禧陵)으로 했다가 현재 서삼릉 능역 내에 있는 제1계비 장경왕후 윤씨의 능인 희릉 오른쪽 언덕에 정릉을 조영했다. 1562년(명종 17) 문정왕후에 의해 선릉 동쪽의 언덕인 현재의 정릉 자리로 옮겨졌다.조성 당시부터 낮은 지세로 문제가 된 정릉은 조성 이후로도 숱한 침수를 겪었다.
[본문] 9대 성종과 계비 정현왕후 윤씨의 선정릉내 선릉(宣陵) 조선 9대 성종(成宗, 1457~94)과 계비 정현왕후(貞顯王后, 1462~1530) 윤씨의 능이다. 성종은 추존된 덕종과 소혜왕후의 아들로 태어난 지 두 달 만에 부친을 여의었다. 세조의 뒤를 이은 예종이 즉위 1년 만에 승하하자 정희왕후의 명으로 1469년 왕위에 오른 성종은 태조 이후 닦아온 모든 체제와 기반을 완성시켜 조선 초기의 문화를 꽃피웠다.정
[본문] 딸,사위, 폐비 거창군부인 신씨,후궁 조씨와 같이 있는 연산군묘(燕山君墓) 연산군의 사위인 능성구씨의 선산에 왕비인 거창군부인 신씨,묘역 아래쪽에는 후궁인 의정궁주조씨묘(義貞宮主趙氏墓) 및 연산군(燕山君)사위 구문경묘(具文景墓)와 연산군(燕山君)딸의 묘가 있다.
[본문] 조선왕릉 탐사 여섯번째. 태강릉의 태릉,강릉 그리고 6.25 흔적이 생생히 남아있는 광릉 태강릉중에서 강릉은 비공개릉이었다. 예산등의 문제로 공개를 하지못하는데, 촬영을 할수없을뻔했으나, 태강릉 관리소장님의 배려로 소중환 촬영기회를 가질수 있었다.
[본문] 힘들게 찍은 비공개릉 조선 13대 명종과 인순왕후심씨의 태강릉내 강릉(康陵) 명종은 중종의 둘째 아들로 1545년 인종이 승하하자 12세 나이로 왕위에 올라 문정왕후의 수렴청정을 받았다. 인순왕후가 낳은 순회세자가 죽은 지 2년 만에 의지했던 어머니 문정왕후마저 숨지자 명종은 마음의 병을 얻었다. 선정을 베풀고자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한 채 명종은 보령 34세로 승하했다.명종 승하한 후 인순왕후는 덕흥대원군(중종의 일곱째 아들)의
[본문] 8년간 수렴청정을한 중종의 제2계비 문정왕후 윤씨의 태강릉내 태릉(泰陵) 문정왕후는 중종과의 사이에 명종을 비롯해 1남 4녀를 두었다. 명종이 12세에 왕위에 오르자 8년간 수렴청정을 한 문정왕후는 동생 윤원형을 내세워 을사사화, 양재역 벽서사건 등을 일으켜 많은 사람들을 처벌했다. 또 당대의 고승 보우(普雨)를 앞세워 불교 부흥을 도모했다. 6.25때 멸실된 것을 1994년 복원하였다.
[본문] 6.25때 기총소사에 박살난 무인석의 석마가 있는 세조와 정희왕후 윤씨의 광릉(光陵) 조선 7대 세조(世祖, 1417~68)와 정희왕후(貞熹王后, 1418~83) 윤씨의 능이다. 광릉은 조선조 내내 풀 한 포기의 채취도 금할 정도로 잘 보호되어 동식물의 낙원이자 천연의 자연 박물관이다. 세조는 세종의 둘째 아들로 1445년 수양대군으로 책봉되었다. 권력에 대한 야심이 컸던 세조는 1452년 단종 즉위 후 계유정난(癸酉靖難)을 일으키고 권력을
[본문] 조선왕릉 탐사 다섯번째. 서오릉과 서삼릉 조선왕릉 탐사 다섯번째. 일산에 있는 서오릉과 서삼릉을 찾았다.서오릉의 경릉·창릉·익릉·명릉·홍릉,서삼릉의 희릉, 예릉을 볼수있었다.또 서삼릉에서 관리하는 몇군데는 축협의 초지안에 릉이 있어서 볼수가없었다.
[본문] 사도세자 큰아들 의소세자의 서삼릉내 의령원(懿寧園)과 효창공원에서 옮겨온 정조와 의빈 성씨의 아들 문효세자의 효창원(孝昌園) 의령원은 영조의 아들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의 큰아들 의소세손의 원이다. 태어난 다음해 세손에 책봉되었으나 이듬해 3세의 나이로 죽었다. 처음에 서울 서대문구 북아현동(현 추계예술대학, 중앙여고 자리)에 묻혔다가 1949년 이곳으로 이장. 효창원은 정조와 의빈 성씨의 아들 문효세자의 원이다. 처음에는 용산구 청파동에 장사지내 효창묘라 했다가 효창원으로 바
[본문] 조선 11대 중종의 제1계비 장경왕후 윤씨의 서삼릉내 희릉(禧陵) 처음에는 헌릉 서쪽 언덕에 조성. 그런데 중종의 부마가 된 김안로가 세자(인종)를 보호한다는 구실로 희릉 천릉사건, 희릉 밑에 큰 돌이 깔려 있어 불길하다 하여 중종 32년 현재의 위치로 옮기게 되었다. 중종의 유교에 따라 중종의 정릉을 희릉 옆에 조영하고, 정자각을 왕릉과 왕비릉 중간으로 옮겨 세우고, 왕의 능호를 사용했다. 그후 문정왕후의 주장에 의해
[본문] 강화도령 조선 25대 철종과 그의 비 철인왕후의 서삼릉내 예릉(睿陵) 강화도령으로 불리며 세도정치에 휘둘렸던 철종의 삶과는 달리, 철종의 뒤를 이어 즉위한 고종은 철종의 능을 매우 거창하고 웅장하게 꾸미게 된다. 이는 왕실의 오랜 세도정치를 타파하고 왕권강화를 꿈꾸던 대원군의 뜻이기도 하였다. 부덕이 높은 여인이었던 철인왕후는 1878년(고종 15)에 승하 후 철종 곁에 안장되었다 .
[본문] 숙종의 빈에서 왕비로, 다시 빈이 된 경종의 어머니 장희빈의 서오릉내 대빈묘(大嬪墓) 숙종 12 숙원(淑媛)이 되었으며 왕자 윤(경종)을 낳았다. 이듬해 숙종이 송시열 등 서인의 반대를 물리치고 윤을 원자로 책봉함에 따라 내명부 정1품 희빈에 올랐다.남인이 집권하면서 인현왕후가 폐위되었고 윤이 세자로 책봉되면서 왕비로 책봉되었다. 인현왕후가 복위됨에 따라 다시 희빈으로 밀려났다. 1701년 민비가 병으로 죽자, 인현왕후를 무고했다는 서인의
[본문] 13년밖에 살지못한 명종의 큰아들 순회세자와 빈 공회빈윤씨 서오릉내 순창원(順昌園) 조선 13대 명종의 큰아들 순회세자(順懷世子)와 그의 빈 공회빈(恭懷嬪) 윤씨의 능이다. 순회세자는 7세에 세자로 책봉되었다. 황대임의 딸과 혼담이 오갔으나 그녀가 병약하여 1년 넘게 가례를 미루자 1559년 윤옥의 딸로 세자빈이 교체되어 가례를 올렸다. 그러나 순회세자는 가례를 올린 지 얼마 되지 않아 후사도 잇지 못한 채 1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
[본문] 쌍릉으로 조성되었으나, 한쪽이 비어있는 영조의 원비 정성왕후의 서오릉내 홍릉(弘陵) 영조는 정성왕후의 묏자리를 정하면서 능 오른쪽(바라보아 왼쪽)을 자신의 자리로 잡아놓으면서 쌍릉으로 예상하여 배치해놓았으나 영조 승하 후 정조는 영조의 능을 완전한 길지라고 주장하는 지금의 원릉 자리(동구릉)에 정했으므로 홍릉은 이처럼 한 쪽에 빈 채로 남아 있다. 영조가 원래 자신의 자리로 정해놓았던 자리는 비어 있고(우허제右虛制) 그 앞으로 석물이 놓
[본문] 서오릉 가장 높은곳에 위치한 조선 19대 숙종의 원비 인경왕후 김씨의 익릉(翼陵) 조선 19대 숙종의 원비 인경왕후(仁敬王后, 1661~80) 김씨의 능이다. 인경왕후는 1670년 세자빈으로 간택되어 1674년 숙종이 즉위하면서 왕비로 책봉되었다. 20세 때 천연두를 앓다가 승하했다. 슬하에 공주 셋을 낳았으나 명선·명혜·명안공주 모두 오래 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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