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가야왕릉탐사 김해 금관가야의 구산동 고분군, 대성동 고분군 가야왕릉탐사 김해 금관가야의 구산동 고분군, 대성동 고분군 금관가야는 본가야(本伽倻)라고도 한다. 원래 9촌(村)의 장(長)이 있어서 각촌을 다스리다가, 수로왕이 나와서 9촌을 통일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수로는 그때의 군장(君長)이 아니라, 후대로 내려와 본가야 중심의 6가야 연맹체를 결성할 때의 가야의 중시조(中始祖)라는 설(說)도 있다.
[본문] 가야왕릉탐사 김해의 금관가야(金官加耶) 시조 김수로왕릉, 허황옥왕비릉, 구지봉(龜旨峰) 가야왕릉탐사 김해의 금관가야(金官加耶) 시조 김수로왕릉, 허황옥왕비릉, 구지봉(龜旨峰) 일명 ‘수릉(首陵)’이라고도 하며, 금관가야의 시조이며 또한 김해김씨(金海金氏)의 시조이기도 하다.
[본문] 가야왕릉탐사 경북 고령(高靈)의 대가야(大加耶) 박물관, 지산리 고분군 가야왕릉탐사 경북 고령(高靈)의 대가야(大加耶) 박물관, 지산리 고분군 200기가 넘는 크고 작은 대가야시대의 무덤들이 있는데 윗부분은 지름 10m 이상의 대형무덤이, 중간에는 지름 10m 안팎의 중간크기의 무덤이, 그리고 아래쪽에는 작은 무덤들이 주로 모여 있다.이곳 주산의 남쪽 제일 큰 무덤이 금림왕의 능이라고 전해지고 있으며 그 아래로 큰 무덤들도
[본문] 가야왕릉탐사 성산가야(星山伽倻)의 고분군 경북 성주군  성산동고분 가야왕릉탐사 성산가야(星山伽倻)의 고분군 경북 성주군  성산동고분 경상북도 성주 지역에 있던 나라로 벽진가야(碧珍伽耶)라고도 한다. 성주군 내에는 성산동 ·명천동 ·용각동고분군이 있는데 이 중 성산동고분군이 규모가 가장 크고, 또 낙동강 지류의 합류 지점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있다.
[본문] 가야왕릉탐사 고령가야(古寧伽倻)의 시조이자 함창김씨의 시조 경북 상주 함참의 태조왕릉 가야왕릉탐사 고령가야(古寧伽倻)의 시조이자 함창김씨의 시조 경북 상주 함참의 태조왕릉 42년 낙동강을 중심으로 일어난 여섯 가야(伽倻) 중 하나인 고령가야 태조의 무덤이라고 전해오고 있다.고령가야는 낙동강 일대인 함창, 문경, 가은 지방을 영역으로 하여 세워진 나라로,『삼국유사』의 5가야조와『삼국사기』의 고령군조에 그 이름이 보이고 있다.조선 선조 25
[본문] 신라왕릉탐사 역대 왕릉 중에서 규모가 크고 형식이 완전히 갖추어진 대표왕릉 42대 흥덕왕릉 신라왕릉탐사 역대 왕릉 중에서 규모가 크고 형식이 완전히 갖추어진 대표왕릉 42대 흥덕왕릉(興德王, AD 826-836) 흥덕왕은 임금이 된 첫해에 왕비인 장화부인(章和夫人)이 죽었는데, 11년 동안 죽은 장화부인만 생각하다가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왕이 장화부인의 무덤에 합장하기를 유언하여 흥덕왕릉에 합장하였다고 하며, 능의 주변에서 ‘興德’이라 새겨진
[본문] 서강대 경희동문 서강대 경희동문
[본문] 잊혀진 왕국 금관가야(金官加耶), 대가야(大加耶), 소가야(小加耶), 아라가야(阿羅加耶), 고령가야(古寧伽倻), 성산가야(星山伽倻), 비화가야 잊혀진 왕국 가야(伽揶) 연맹체 김해의 금관가야(金官加耶), 고령(高靈)의 대가야(大加耶), 고성의 소가야(小加耶), 함안의 아라가야(阿羅加耶), 상주의 고령가야(古寧伽倻), 성주의 성산가야(星山伽倻), 창녕의 비화가야(比火加耶)
[본문] 입학 30주년 기념 청평에서의 1박2일 대학입학동기들 모임 입학 30주년 기념 청평에서의 1박2일 대학입학동기들 모임
[본문] 신라왕릉탐사 선덕여왕의 뒤를 이은 신라 2번째 여왕, 제28대 진덕여왕릉 신라왕릉탐사 선덕여왕의 뒤를 이은 신라 2번째 여왕, 제28대 진덕여왕릉 제28대 진덕여왕(眞德女王 재위 647∼654, 승만)은 진평왕의 동생인 국반갈문왕(國飯葛文王)과 월명부인(月明夫人)의 딸이다. 당나라와의 친교를 돈독히 하였으며 백제 정벌의 원군을 요청하기도 하였다. 국내적으로는 명장 김유신으로 하여금 국력을 튼튼히 하여 삼국통일의 기틀을 다졌다.
[본문] 신라왕릉탐사 십이지신상중에 북쪽에 있는 쥐,소,범,토끼,돼지만 남아있는 제 41대 헌덕왕릉 신라왕릉탐사 십이지신상중에 북쪽에 있는 쥐,소,범,토끼,돼지만 남아있는 제 41대 헌덕왕릉 제41대 헌덕왕(憲德王, 재위 809∼826, 김언승)은 왕위에 있는 동안 김헌창의 반란을 평정하였으며, 당(唐)나라와 원만한 외교관계를 유지하였고, 국방에 힘써 패강장성(浿江長城)을 쌓았다. 고려,조선 시대의 기록에 북천이 범람하여 능이 훼손되었다고 전하며, 19
[본문] 신라왕릉탐사 신라 왕릉 가운데 가장 크고 화려한 모습의 38대 원성왕의 괘릉 신라왕릉탐사 신라 왕릉 가운데 가장 크고 화려한 모습의 38대 원성왕의 괘릉 괘릉이란 ‘걸어놓은 능’이라는 뜻으로, 관을 묻을 때 물이 나와서 돌기둥을 받치고 그 위에 시신을 넣은 관을 올려놓았다는 데서 유래한 이름이다. 제38대 왕(재위 785∼798, 김경신)의 능으로 추정되고 있다. 독서삼품과를 두어 인재를 등용하였고 김제 벽골제를 증축하여 농사를
[본문] 신라왕릉탐사 벌초도 않된 상태로 방치되고 있는 43대 희강왕릉과 44대 민애왕릉 신라왕릉탐사 벌초도 않된 상태로 방치되고 있는 43대 희강왕릉과 44대 민애왕릉 43대 희강왕(僖康王, 재위 836∼838, 김제륭/김제옹)은 원성왕의 손자인데, 흥덕왕이 자식 없이 죽자 재위하였으나, 상대등 김명이 난을 일으키자 자살하였다. 44대 민애왕(閔哀王, 재위 838∼839, 김명)은 희강왕을 살해하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가, 재위 1년 만에
[본문] 신라왕릉탐사 35대 경덕왕릉 신라왕릉탐사 35대 경덕왕릉 제35대 경덕왕(景德王 재위 742∼765, 김헌영)은 효성왕의 친동생으로 왕위를 계승하여 국가의 제반제도를 중국식으로 개편하고, 지방제도를 완비하였다. 굴불사(掘佛寺)와 불국사를 창건하였으며, 황룡사 대종과 성덕대왕 신종도 만들었다. 능은 맨 아래에 지대석을 놓고 면석과 기둥 역할을 하는 탱석을 교대로 세우고, 탱석 두 칸
[본문] 신라왕릉탐사 49대 헌강왕릉과 50대 정강왕릉 신라왕릉탐사 49대 헌강왕릉과 50대 정강왕릉 제49대 헌강왕(憲康王, 재위 875∼886, 김정)은 경문왕의 태자로서 문치를 잘 하였으며 이 시기에 처용무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왕위에 있는 동안 태평성대를 이루었는데, 거리마다 노랫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일본왕이 사신을 보내 황금을 바칠 정도였다고 한다. 제50대 정강왕(定康王 재위 886∼887, 김황)
[본문] 신라왕릉탐사 못오도록 꼭꼭 숨겨둔 32대 효소왕릉과 33대 성덕왕릉 신라왕릉탐사 못오도록 꼭꼭 숨겨둔 32대 효소왕릉과 33대 성덕왕릉 효소왕(재위 692∼702, 김이공)은 시장을 개설하여 경제력을 확충하고, 당나라/일본과 문물을 교류하는 등 국력을 키우는 데 힘썼다.성덕왕(聖德王, 재위 702∼737, 김흥광)은 신문왕의 둘째 아들로 형인 효소왕의 뒤를 이어 36년 동안 통치하면서, 안으로는 정치를 안정시키고 밖으로는
[본문] 신라왕릉탐사 45대 신무왕릉 신라왕릉탐사 45대 신무왕릉 신라 제45대 신무왕(재위 839, 김우징)은 원성왕(元聖王)의 증손으로 839년에 장보고(張保皐)의 힘을 빌어 민애왕(閔哀王)을 죽이고 왕위에 올랐으나 그 해에 병(病)으로 죽었다.『삼국사기, 三國史記』에 의하면 "왕이 돌아가시자 제형산(弟兄山) 서북쪽에 장사지냈다."고 하였으나 이 무덤을 가리키는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본문] 신라왕릉탐사 52대 효공왕릉 신라왕릉탐사 52대 효공왕릉 효공왕(재위 897∼912, 김요)은 진성여왕의 뒤를 이어 16년 간 나라를 다스리는 동안 견훤과 궁예가 후백제와 후고구려를 세우고 신라의 영토를 침범하여 나라가 매우 어지러웠으나 평정하지 못하고 돌아갔다고 한다.삼국사기에 "사자사(獅子寺) 북쪽에 장사지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본문] 신라왕릉탐사 드라마때문에 아침부터 붐비는 27대 선덕여왕릉 신라왕릉탐사 드라마때문에 아침부터 붐비는 27대 선덕여왕릉 신라 제27대 선덕여왕(재위 632∼647, 김덕만)은 신라 최초의 여왕으로 첨성대를 만들고, 분황사를 건립하였으며, 황룡사 9층 목탑을 축조하는 등 신라 건축의 금자탑을 이룩하였다. 또 김춘추, 김유신과 같은 인물들을 거느리고 삼국 통일의 기반을 닦았다.
[본문] 신라왕릉탐사 낭산(狼山)의 남쪽 끝에 사다리꼴 44개의 보호석을 가진 제31대 신문왕릉 신라왕릉탐사 낭산(狼山)의 남쪽 끝에 사다리꼴 44개의 보호석을 가진 제31대 신문왕릉 제31대 신문왕(神文王, 재위 681∼692, 김정명)능의 밑둘레에 벽돌 모양으로 다듬은 돌을 5단으로 쌓은 뒤 사다리 꼴로 생긴 44개의 보호석을 설치하였다. 동쪽에는 크고 긴 돌로 쌓은 상석이 있다. 신문왕은 문무왕의 맏아들로 문무왕의 뜻을 이어받아 옛 백제와 고구
[본문] 신라왕릉탐사 선덕여왕의 아버지 제 26대 진평왕릉 신라왕릉탐사 선덕여왕의 아버지 제 26대 진평왕릉 진평왕(眞平王, 재위 579∼632, 김백정)능은 아무런 시설 없이 평야 가운데 있는 것이 특징이다. 진평왕은 남산성(南山城)을 쌓았고, 명활산성(明活山城)을 개축하는 등 경주방위를 중요시하였다. 왕으로 있는 동안 고구려·백제와 싸움이 빈번했으며, 중국의 수(隋)나라·진(陳)나라·당(唐)나라와의 외교에 힘
[본문] 신라왕릉탐사 역사상 가장 위대했던 화랑, 삼국통일의 주역 김유신장군묘 신라왕릉탐사 역사상 가장 위대했던 화랑, 삼국통일의 주역 김유신장군묘 김유신(595∼673) 은 금관가야 마지막 왕인 구형왕의 증손으로 15세에 화랑이 되었으며, 무예와 지략이 뛰어나 나라에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앞장서서 지휘하였다.신라 태종무열왕 7년(660)에 나당 연합군이 결성되었을 때 신라군 총사령관이 되어 백제,고구려를 병합하였다. 문무왕 때에는
[본문] 신라왕릉탐사 안내판이 전혀없는 24대 진흥왕릉, 25대 진지왕릉, 46대 문성왕릉, 47대 헌안왕릉 그리고 서악리 3층석탑 신라왕릉탐사 안내판이 전혀없는 24대 진흥왕릉, 25대 진지왕릉, 46대 문성왕릉, 47대 헌안왕릉 그리고 서악리 3층석탑 진흥왕(眞興王, 재위 540∼576, 김삼맥종)안으로는 화랑제도를 마련하고, 『국사, 國史』를 편찬하였으며, 불교를 장려하여 국력을 다졌고, 밖으로는 가야를 병합하고 한강(漢江) 유역에 한산주(漢山州)를 두는 등 영토를 크게 넓혔다.
[본문] 신라왕릉탐사 29대 무열왕릉(김춘추)과 서악리 고분군, 김양, 김인문의 묘 신라왕릉탐사 29대 무열왕릉(김춘추)과 서악리 고분군, 김양, 김인문의 묘 태종무열왕(재위 654∼661, 김춘추)은 중대(中代)의 첫 진골(眞骨)출신 왕으로 당과 연합하여 백제를 병합하고 통일 대업의 기반을 닦았으나 통일을 완수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동쪽에 비석을 세웠던 돌 거북 받침돌과 머릿돌이 남아있는데, 무열왕의 둘째 아들인 김인문(金仁問)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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