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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왕릉탐사 역대 왕릉 중에서 규모가 크고 형식이 완전히 갖추어진 대표왕릉 42대 흥덕왕릉 |
신라왕릉탐사 역대 왕릉 중에서 규모가 크고 형식이 완전히 갖추어진 대표왕릉 42대 흥덕왕릉(興德王, AD 826-836)
흥덕왕은 임금이 된 첫해에 왕비인 장화부인(章和夫人)이 죽었는데, 11년 동안 죽은 장화부인만 생각하다가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왕이 장화부인의 무덤에 합장하기를 유언하여 흥덕왕릉에 합장하였다고 하며, 능의 주변에서 ‘興德’이라 새겨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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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왕릉탐사 선덕여왕의 뒤를 이은 신라 2번째 여왕, 제28대 진덕여왕릉 |
신라왕릉탐사 선덕여왕의 뒤를 이은 신라 2번째 여왕, 제28대 진덕여왕릉
제28대 진덕여왕(眞德女王 재위 647∼654, 승만)은 진평왕의 동생인 국반갈문왕(國飯葛文王)과 월명부인(月明夫人)의 딸이다. 당나라와의 친교를 돈독히 하였으며 백제 정벌의 원군을 요청하기도 하였다. 국내적으로는 명장 김유신으로 하여금 국력을 튼튼히 하여 삼국통일의 기틀을 다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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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왕릉탐사 십이지신상중에 북쪽에 있는 쥐,소,범,토끼,돼지만 남아있는 제 41대 헌덕왕릉 |
신라왕릉탐사 십이지신상중에 북쪽에 있는 쥐,소,범,토끼,돼지만 남아있는 제 41대 헌덕왕릉
제41대 헌덕왕(憲德王, 재위 809∼826, 김언승)은 왕위에 있는 동안 김헌창의 반란을 평정하였으며, 당(唐)나라와 원만한 외교관계를 유지하였고, 국방에 힘써 패강장성(浿江長城)을 쌓았다. 고려,조선 시대의 기록에 북천이 범람하여 능이 훼손되었다고 전하며, 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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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왕릉탐사 신라 왕릉 가운데 가장 크고 화려한 모습의 38대 원성왕의 괘릉 |
신라왕릉탐사 신라 왕릉 가운데 가장 크고 화려한 모습의 38대 원성왕의 괘릉
괘릉이란 ‘걸어놓은 능’이라는 뜻으로, 관을 묻을 때 물이 나와서 돌기둥을 받치고 그 위에 시신을 넣은 관을 올려놓았다는 데서 유래한 이름이다. 제38대 왕(재위 785∼798, 김경신)의 능으로 추정되고 있다. 독서삼품과를 두어 인재를 등용하였고 김제 벽골제를 증축하여 농사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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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왕릉탐사 벌초도 않된 상태로 방치되고 있는 43대 희강왕릉과 44대 민애왕릉 |
신라왕릉탐사 벌초도 않된 상태로 방치되고 있는 43대 희강왕릉과 44대 민애왕릉
43대 희강왕(僖康王, 재위 836∼838, 김제륭/김제옹)은 원성왕의 손자인데, 흥덕왕이 자식 없이 죽자 재위하였으나, 상대등 김명이 난을 일으키자 자살하였다. 44대 민애왕(閔哀王, 재위 838∼839, 김명)은 희강왕을 살해하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가, 재위 1년 만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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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왕릉탐사 35대 경덕왕릉 |
신라왕릉탐사 35대 경덕왕릉
제35대 경덕왕(景德王 재위 742∼765, 김헌영)은 효성왕의 친동생으로 왕위를 계승하여 국가의 제반제도를 중국식으로 개편하고, 지방제도를 완비하였다. 굴불사(掘佛寺)와 불국사를 창건하였으며, 황룡사 대종과 성덕대왕 신종도 만들었다. 능은 맨 아래에 지대석을 놓고 면석과 기둥 역할을 하는 탱석을 교대로 세우고, 탱석 두 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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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왕릉탐사 49대 헌강왕릉과 50대 정강왕릉 |
신라왕릉탐사 49대 헌강왕릉과 50대 정강왕릉
제49대 헌강왕(憲康王, 재위 875∼886, 김정)은 경문왕의 태자로서 문치를 잘 하였으며 이 시기에 처용무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왕위에 있는 동안 태평성대를 이루었는데, 거리마다 노랫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일본왕이 사신을 보내 황금을 바칠 정도였다고 한다. 제50대 정강왕(定康王 재위 886∼887, 김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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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왕릉탐사 못오도록 꼭꼭 숨겨둔 32대 효소왕릉과 33대 성덕왕릉 |
신라왕릉탐사 못오도록 꼭꼭 숨겨둔 32대 효소왕릉과 33대 성덕왕릉
효소왕(재위 692∼702, 김이공)은 시장을 개설하여 경제력을 확충하고, 당나라/일본과 문물을 교류하는 등 국력을 키우는 데 힘썼다.성덕왕(聖德王, 재위 702∼737, 김흥광)은 신문왕의 둘째 아들로 형인 효소왕의 뒤를 이어 36년 동안 통치하면서, 안으로는 정치를 안정시키고 밖으로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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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왕릉탐사 45대 신무왕릉 |
신라왕릉탐사 45대 신무왕릉
신라 제45대 신무왕(재위 839, 김우징)은 원성왕(元聖王)의 증손으로 839년에 장보고(張保皐)의 힘을 빌어 민애왕(閔哀王)을 죽이고 왕위에 올랐으나 그 해에 병(病)으로 죽었다.『삼국사기, 三國史記』에 의하면 "왕이 돌아가시자 제형산(弟兄山) 서북쪽에 장사지냈다."고 하였으나 이 무덤을 가리키는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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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왕릉탐사 52대 효공왕릉 |
신라왕릉탐사 52대 효공왕릉
효공왕(재위 897∼912, 김요)은 진성여왕의 뒤를 이어 16년 간 나라를 다스리는 동안 견훤과 궁예가 후백제와 후고구려를 세우고 신라의 영토를 침범하여 나라가 매우 어지러웠으나 평정하지 못하고 돌아갔다고 한다.삼국사기에 "사자사(獅子寺) 북쪽에 장사지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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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왕릉탐사 드라마때문에 아침부터 붐비는 27대 선덕여왕릉 |
신라왕릉탐사 드라마때문에 아침부터 붐비는 27대 선덕여왕릉
신라 제27대 선덕여왕(재위 632∼647, 김덕만)은 신라 최초의 여왕으로 첨성대를 만들고, 분황사를 건립하였으며, 황룡사 9층 목탑을 축조하는 등 신라 건축의 금자탑을 이룩하였다. 또 김춘추, 김유신과 같은 인물들을 거느리고 삼국 통일의 기반을 닦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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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왕릉탐사 낭산(狼山)의 남쪽 끝에 사다리꼴 44개의 보호석을 가진 제31대 신문왕릉 |
신라왕릉탐사 낭산(狼山)의 남쪽 끝에 사다리꼴 44개의 보호석을 가진 제31대 신문왕릉
제31대 신문왕(神文王, 재위 681∼692, 김정명)능의 밑둘레에 벽돌 모양으로 다듬은 돌을 5단으로 쌓은 뒤 사다리 꼴로 생긴 44개의 보호석을 설치하였다. 동쪽에는 크고 긴 돌로 쌓은 상석이 있다. 신문왕은 문무왕의 맏아들로 문무왕의 뜻을 이어받아 옛 백제와 고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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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왕릉탐사 선덕여왕의 아버지 제 26대 진평왕릉 |
신라왕릉탐사 선덕여왕의 아버지 제 26대 진평왕릉
진평왕(眞平王, 재위 579∼632, 김백정)능은 아무런 시설 없이 평야 가운데 있는 것이 특징이다. 진평왕은 남산성(南山城)을 쌓았고, 명활산성(明活山城)을 개축하는 등 경주방위를 중요시하였다. 왕으로 있는 동안 고구려·백제와 싸움이 빈번했으며, 중국의 수(隋)나라·진(陳)나라·당(唐)나라와의 외교에 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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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왕릉탐사 역사상 가장 위대했던 화랑, 삼국통일의 주역 김유신장군묘 |
신라왕릉탐사 역사상 가장 위대했던 화랑, 삼국통일의 주역 김유신장군묘
김유신(595∼673) 은 금관가야 마지막 왕인 구형왕의 증손으로 15세에 화랑이 되었으며, 무예와 지략이 뛰어나 나라에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앞장서서 지휘하였다.신라 태종무열왕 7년(660)에 나당 연합군이 결성되었을 때 신라군 총사령관이 되어 백제,고구려를 병합하였다. 문무왕 때에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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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왕릉탐사 안내판이 전혀없는 24대 진흥왕릉, 25대 진지왕릉, 46대 문성왕릉, 47대 헌안왕릉 그리고 서악리 3층석탑 |
신라왕릉탐사 안내판이 전혀없는 24대 진흥왕릉, 25대 진지왕릉, 46대 문성왕릉, 47대 헌안왕릉 그리고 서악리 3층석탑
진흥왕(眞興王, 재위 540∼576, 김삼맥종)안으로는 화랑제도를 마련하고, 『국사, 國史』를 편찬하였으며, 불교를 장려하여 국력을 다졌고, 밖으로는 가야를 병합하고 한강(漢江) 유역에 한산주(漢山州)를 두는 등 영토를 크게 넓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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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왕릉탐사 29대 무열왕릉(김춘추)과 서악리 고분군, 김양, 김인문의 묘 |
신라왕릉탐사 29대 무열왕릉(김춘추)과 서악리 고분군, 김양, 김인문의 묘
태종무열왕(재위 654∼661, 김춘추)은 중대(中代)의 첫 진골(眞骨)출신 왕으로 당과 연합하여 백제를 병합하고 통일 대업의 기반을 닦았으나 통일을 완수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동쪽에 비석을 세웠던 돌 거북 받침돌과 머릿돌이 남아있는데, 무열왕의 둘째 아들인 김인문(金仁問)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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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왕릉탐사 23대 법흥왕릉 |
신라왕릉탐사 23대 법흥왕릉
법흥왕(재위 514∼540, 김원종)은 지증왕의 맏아들이다. 최초로 병부를 두고 율령반포등 신라의 국가체제를 정비하는 기초를 세웠으며, 금관국합병합병등의 신라의 영토를 크게 넓혔다. 또한 건원(建元)이라는 신라 최초의 독자적인 연호(年號)를 사용하였다. 528에는 불교를 공인하여, 국교로 정하고, 신라 최초의 사찰인 흥륜사(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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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왕릉탐사 세계유산 경주유적지구 경주동부사적지대 17대 내물마립간의 내물왕릉 |
신라왕릉탐사 경주동부사적지대 17대 내물마립간의 내물왕릉
내물왕(奈勿王, 재위 356∼402)을 모신 곳으로 대릉원의 남쪽이자 월성(月城)에서도 가까운 곳이다. 왕은 김씨로는 두 번째로 왕위에 올랐다. 이후 김씨 성에 의한 독점적 왕위계승이 이루어진다. 내물왕은 중국의 문물을 받아들이고 여러 차례 왜구의 침입을 물리치는 등 고대 국가의 체제를 확립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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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왕릉탐사 최초의 김씨왕 13대 미추이사금릉과 천마총, 황남대총등 고분이 있는 대릉원의 황남리고분군 |
신라왕릉탐사 최초의 김씨왕 13대 미추이사금릉과 천마총, 황남대총등 고분이 있는 대릉원의 황남리고분군
신라 제13대 미추왕(味鄒王, 재위 262∼284)을 모신 곳으로, 대나무가 병사로 변하여 적군을 물리쳤다는 전설에 따라 '죽현릉(竹現陵)'이라고도 한다. 미추왕은 김알지(金閼智)의 후예로 신라 최초의 김씨 왕이며, 여러 차례 백제의 공격을 막아내고 농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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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왕릉탐사 8대 아달라이사금, 53대 신덕왕, 54대 경명왕의 배리삼릉과 55대 경애왕릉 |
신라왕릉탐사 8대 아달라이사금, 53대 신덕왕, 54대 경명왕의 배리삼릉과 55대 경애왕릉
아달라왕(재위 154∼184)은 백제가 침입하여 백성을 잡아가자 친히 군사를 출동하여 전장에 나아갔다. 그러나 백제가 화친을 요청하자 포로들을 석방하였다. 왜(倭)에서는 사신을 보내왔다. 효공왕(孝恭王)이 자손이 없이 죽자 백성들이 헌강왕(憲康王)의 사위인 신덕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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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왕릉탐사 7대 일성이사금릉, 경덕사, 6부촌장의 위패는 모신 사당인 양산재 |
신라왕릉탐사 7대 일성이사금릉, 경덕사, 6부촌장의 위패는 모신 사당인 양산재
신라 제7대 일성왕(逸聖王, 재위 134∼154)을 모신 곳이다. 경주 남산의 북쪽인 해목령(蟹目嶺)에서 뻗어내리는 능선의 서쪽 경사면에 위치하고 있다. 일성왕의 성은 박씨(朴氏)인데 『삼국사기, 三國史記』에는 제3대 유리왕(儒理王)의 맏아들로,『삼국유사, 三國遺事』에는 제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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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왕릉탐사 6대 지마 이사금릉 과 경애왕이 후백제 견훤군대의 습격을 받아 최후를 마친 곳으로 알려져 있는 포석정 |
신라왕릉탐사 6대 지마 이사금릉 과 경애왕이 후백제 견훤군대의 습격을 받아 최후를 마친 곳으로 알려져 있는 포석정
신라 제6대 지마왕(祗摩王, 재위 112∼134)을 모신 곳으로 남산의 서쪽 하단에 위치해 있다. 능은 밑둘레 38m, 높이 3.4m로 흙을 둥글게 쌓아올린 형태이며 별다른 특징은 없다. 왕은 파사왕(破娑王)의 아들로 태어나 23년 간 재위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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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왕릉탐사 4대 탈해이사금릉 과 숭신전(崇信殿), 경주이씨의 표암(瓢巖) |
4대 탈해이사금릉 과 숭신전(崇信殿) , 경주이씨의 표암(瓢巖)
이 능은 신라 제4대 탈해왕(脫解王, 재위 57∼80)을 모신 곳이다. 왜국(倭國)에서 동북쪽으로 1천 리 떨어져 있는 다파나국(多婆那國, 또는 '완하국', '용성국')의 왕비가 잉태한 지 7년 만에 큰 알을 낳았다. 이는 상서롭지 못한 일이라 하여 그 알을 궤에 넣어 바다에 버리니 동해 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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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왕릉탐사 1대 박혁거세, 2대 남해차차웅, 3대 유리이사, 5대 파사이사금의 오릉,숭덕전,알영정, 나정(蘿井) |
신라 왕릉탐사 1대 박혁거세, 2대 남해차차웅, 3대 유리이사, 5대 파사이사금의 오릉, 숭덕전,알영정, 나정(蘿井)
다섯 무덤은 신라 시조 박혁거세왕(赫居世王)과 제2대 남해왕(南解王) , 제3대 유리왕(儒理王), 제5대 파사왕(婆娑王) 등 초기의 박씨 임금 네 분과, 혁거세왕의 왕후 알영부인(閼英夫人)의 능으로 전해 온다. 경내에는 혁거세왕의 제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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